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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Dec 30. 2019

영화 <윤희에게>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근 들어 설경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러브레터>나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다시 볼까 하던 차에 <윤희에게>라는 눈 덮인 북해도가 배경인 영화가 개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왕이면 최신의 설경을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극장으로 향했다.  사람 키높이까지 쌓인 눈만 볼 수 있다면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야 어떻든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윤희 (김희애) 





급식실 주방 아줌마로 일하며, 고3 딸을 키우는 싱글맘 윤희는 웃는 걸 잊어버린 사람 같다. 노상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다  살짝 까칠한 분위기까지 풍겨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느껴진다. 사는데 아무 낙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랄까. 퇴근 후에 골목 어귀에서 하루치의 허무와 피로를 뱉어내듯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유일한 낙으로 보인다. 왜 사냐고 물으면  자식 때문에 산다고 대답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도 그다지 살가운 엄마는 아니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은 꼭 마지못해 산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윤희에게 멀리 북해도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윤희의 딸 새봄 (김소혜)





윤희의 딸 새봄은 우편함에서 엄마 앞으로 온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먼저 열어본다.  편지를 통해 엄마에게 자기가 몰랐던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새봄은 엄마를 위해 특별한 여행을 계획한다. 





윤희의 첫사랑 쥰 (나카무라 유코)





그 편지는 오타루에 사는 쥰에게서 온 것이다. 20여 년 전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온 쥰은 뜻밖에도 아버지가 아닌 고모와 살게 되었다.  그녀는 성격과 뜻이 잘 맞는 고모와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윤희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운 윤희는 헤어진 지 20년도 더 지났음에도 여전히 꿈에 나온다.     쥰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오래 참아왔던 그리움을 더는 이기지 못하고 윤희에게 편지를 쓰지만 붙이지는 못한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고모가 쥰 몰래 편지를 발송한 것이다. 





쥰의 집과 고모네 카페를 염탐하는 새봄과 경수





새봄은 외롭고 고단해 보이는 엄마가 늘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쥰에게서 온 편지를 엄마 몰래 읽은 후로 새봄은 아빠를 찾아가 엄마와 헤어진 이유를 묻기도 하고, 외삼촌에게 엄마의 젊은 시절에 대해 묻기도 하면서 엄마의 삶을 알아간다.  그리고 대학 입학을 명분 삼아 엄마와 오타루로 여행을 간다. 엄마 윤희가 쥰을 만날 수 있도록 비밀스러운 작전을 실행한다.   이 깜찍한 작전에 비밀 요원이 한 명 더 투입되는데 바로 새봄의 동갑내기 남자 친구 경수다.  엄마 몰래 경수와 비밀 데이트를 즐기는 짬짬이 엄마를 위한 작전도 빈틈없이 실행해나가는 새봄과 경수가 너무나 귀엽고 기특하다. 새봄이 이런 작전을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윤희는 윤희 나름대로 쥰의 주변을 맴돌지만 끝내 다가서지는 못한다. 딸 덕분에 어렵게 휴가를 만들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운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윤희의 어려운 마음이 이해가 되어 더욱 안타까웠다. 










난 특히  모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의 특별할 것 없음에  끌렸다.  하릴없이 눈밭을 걷거나 숙소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겨우 몇 마디 주고받는 게 전부인데 그 시간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간다. 윤희는 참 많은 것을 감추고 억누르고 살아왔고 그래서 새침하게 보이는 엄마인데, 새봄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런 엄마를 바라본다. 집에 있을 때와는 달리 우아한 롱 코트를 차려입은 엄마가 귀여운 듯 새봄은 웃는다. 전혀 몰랐는데 담배를 피우는 엄마가 멋져 보였는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새봄은 엄마가 자기를 표현하는 모습이  반가운 모양이다. 윤희에게 새봄은 그 이름이 꼭 어울리는 선물 같은 아이다. 





쥰과 윤희의 재회 





짧은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혼자서는 끝내 쥰에게 다가서지 못하던 윤희는 새봄 덕분에 첫사랑 쥰과 재회하게 된다.   





새봄의 졸업식에서 웃는 윤희 





마침내  윤희가 웃는다.  가족에 의해 거의 강제로 쥰과 헤어져야 했던 윤희는 그 후로 이어진 자신의 삶을 형벌처럼 여겨왔다. 그렇게 웃음을 잃어간 것이다. 이제 윤희는 더 이상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자기를 잊지 않고 그리워해 준 쥰의 존재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딸 새봄의 사랑으로 그녀는 스스로를 긍정하게 된 것이다.   









오타루에서의 시간 이후로 윤희는 새로운 꿈을 계획하고 도전한다.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은 느낌이랄까. 새봄은 이런 엄마를 응원한다.  따뜻하고 바람직한 결말이다. 



윤희는 좋겠다. 새봄이 같은 딸이 있어서. 엄마의 성 정체성을 알고 많이 놀랐을 텐데 화내거나 부정하지 않고 나름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인정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세대 차이에 따른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작용한 걸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저 그 아이의 마음이 넉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혀 새봄 같은 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엔 엄마에게 서운한 게 너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한 게 너무 많아진다. 이것 참, 부담스러워.... 



영화를 보고 나서 내게는 '그리움'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데 그러자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만나지 못하는 누군가를 향한 끝없는 연모의 마음...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쉽게 헤아려지지 않았다. 그리움의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러나 내게는 그런 그리움이 없다. 그래서 그리움은 스크린 속의 아름다운 감상으로만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그리움을 남기지 않고 살아왔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과거를 뒤지면 뒤질수록 아무것도 그리워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질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쩐지 내가 메마른 사람처럼 느껴져서 조금 겁이 났다.   그러다가 또 메말랐다기보다는 후회를 남기지 않고 살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는데 그러자 내가 굉장히 현재 중심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랬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현재에 충실한 인간이고, 지난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리울만한 순간은 무수히도 많다. 그리울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그때 그걸로 충분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뇌와 심장의 용량이 모자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때때로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난 내 안에서 비롯되지 않는 그리움을 눈 덮인 설경 속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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