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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Jan 04. 2024

독일의 인간 CCTV

독일에서 CCTV가 필요 없는 이유

"자정에 폭죽 터지겠네? 또 커튼 뒤에 숨어서 지켜보겠군"


새해를 앞두고 통화하던 동생이 나를 비웃으며 꺼낸 말이다.

독일에서는 실베스터(Silvester)라 불리는 새해 전야에 악령을 쫓아내기 위한 풍습으로 불꽃놀이를 한다. 남편과 나는 이주 후 맞은 첫 새해 전야에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집 앞을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 풍경은 아름답기보다는 흡사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꽤나 충격적이었다. 처음 보는 격렬한 광경에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폭죽 파편에 맞아 내 파자마에는 구멍이 숭숭 뚫렸고 남편의 다리에서는 거짓말 조금 보태 피가 철철 흘렀다. 그 이후로 우리는 새해 전야에는 밖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작년에 한 이웃이 '밖에서 샴페인 마시며 불꽃놀이 보지 않을래?'라며 제안했지만, 나는 예전의 악몽이 떠오른 데다 그 밤에 사람들과 마주하며 희락을 즐길 에너지가 없을 것 같아 사양했다. 그래서 일찍 잔다는 핑계를 대고 불을 껐지만 요란한 폭죽 소리에 잠이 올리 만무, 그렇게 커튼 뒤에 숨어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당시에 함께 있던 동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 모습을 지켜봤다.


동생과 그런 대화가 오고 가던 중 내가 종종 미어캣이 되어 창밖을 바라보던 게 떠올랐다.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들처럼 창문틀을 팔걸이 삼아 대놓고 지켜보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커튼 뒤에 숨어 바깥 상황을 왕왕 훔쳐보게 되었다.

어쩌다 나도 이렇게 음흉스러운 인간이 되었을까?






독일의 인간 CCTV라고 검색하면 재밌는 짤들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독일에서 주차된 자동차가 사고가 나면 쪽지 3개가 붙는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쪽지는 '건너편에 사는 사람인데 사고 나는 거 봤으니 연락 달라'

두 번째 쪽지는 '바로 앞 집에 사는 사람인데 사고 난 거 봤으니 연락 달라'

세 번째 쪽지는 '사고 낸 사람인데 수리비 관련 연락 달라'는 내용이다.


독일에서는 한국만큼 CCTV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창문 밖을 구경하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우스갯소린데 이는 과거 독일의 분단시절, 상호감시가 일상이었던 모습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싶다.

당시에 동독은 인민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가 안보부(Staatssicherheit), 줄여서 슈타지(Stasi)라는 비밀 기관을 세웠는데 슈타지에서 활동한 비밀경찰들은 이웃 주민,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 동독 시민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통제했다고 한다. 게다가 감시자를 위한 감시까지 있었다니 이런 암울하고 뼈아픈 역사에서 비롯된 습관일 수 있지만 어쨌든 내막을 알면 몸서리가 쳐진다.






산책을 하다 보면 창문에 팔짱을 걸친 채 바깥 구경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목격하게 되는데 나도 독일에 살며 몇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이전에 살던 집엔 주차장이 따로 없어 길거리 주차를 하거나 집에서 7분 거리에 위치한 공용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남편이 외출한 사이 누군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고 이내 자기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빼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차는 분명 공용 주차장에 세워뒀는데 착각했나 싶어 우리 차가 맞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우리 차와 일치하는 차종과 색이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우물쭈물 그를 따라 나서 확인해 보니 우리 차와 똑같이 생긴 차가 그 집 대문을 막고 있었다. <남편이 저런 식으로 주차할리가 없는데> 생각하며 번호판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 차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 집주인도 머쓱해하며 미안하다 하고 헤어졌는데 순간 소름 돋았다. 당시에 우리가 살고 있던 곳엔 우리뿐만 아니라 몇 가구가 더 살고 있었고 나는 집과 마트,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 우리 집을 알고 있는 데다 우리 차까지 알고 있단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 번째 일화 역시 전에 살던 동네에서 일어난 일인데 남편이 퇴근하던 길에 집 앞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그 사람은 본인을 우리 집 뒤편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뒤 오늘 딸 생일 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밤늦게까지 시끄러울 수 있으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날 우리 집 테라스 뒤에서 밤늦게까지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왔는데 당시 우리 집 테라스는 사방이 막혀 있어 바깥 구경을 할 수 없던 구조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 집 뒤편에 또 다른 집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뭔가 트루먼 쇼처럼 그 동네에서 우리 빼고 모두가 우리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 역시 이사오자마자 주민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이사 온 지 얼마 안돼 아직 주민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을 때 나는 분리수거함 앞에서 지금은 이사 가고 없는 한 이웃을 만났다. 그녀는 내게 "새로 왔지? 만나서 반가워, 우린 너희 옆집 살아"하며 손으로 본인 집을 가리키는데 진짜 바로 우리 옆집이었다. <오잉?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데 내가 옆집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이사할 때 지켜본 건가> 당혹감을 감추며 잘 지내보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제는 나도 우리 아파트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의 집까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독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관심을 두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경험들 때문에 특히 동네에서는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됐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감시 아닌 감시가 안심이 될 때도 있다. 우리 아파트에서 몇 달 전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주민들이 합세해 낯선 이가 보이면 주민 단톡방에 글이 올라오곤 했었다. '지금 낯선 사람이 보이는데 혹시 누구 집에 온 방문객인지'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당시에 우리 아파트를 털어간 도둑이 건물 앞에 있던 CCTV를 조작해 단서하나 잡을 수 없었던 상황이라 이런 경계태세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가끔 창밖을 보다 낯선 눈과 마주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럼 그냥 웃고 넘어가면 되는데 나는 아직까지 웃어줄 여유가 없는 하수인가 보다. 주변에 무신경함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녔던 내가, 이제는 낯선 실루엣만 봐도 목을 쭉 빼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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