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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Dec 12. 2023

도로 한가운데서 차가 멈췄다

독일 도로 위 날개 달고 나타난 노란 천사

"엇 차가 왜 이러지?"


기어 변속을 시도하던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러치 페달에 뭔가 이상이 생겼는지 차가 꿀렁대기 시작했고 그대로 도로 위에 멈췄다.


설상가상 핸드폰까지 안 터진다.


우리 이대로 도로 위 미아 되는 거 아니야?






2019년 여름, 한국 여행을 앞두고 남편과 나는 근교 소도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때 우리에겐 연식이 오래된 붕붕이가 있었다. 독일에 올 때 들고 온 쌈짓돈의 1/4을 중고차 값으로 지불한 우리는 당시만 해도 그 녀석과 그렇게 빨리 헤어질 줄 몰랐다.

우리는 녀석과 만나자마자 오스트리아를 시작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를 거쳐 독일 방방곡곡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녀석은 본인의 나이도 망각한 채 독일 아우토반 위,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모진 풍파를 견디며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도로를 달리다 운전석 사이드 미러의 유리가 뚝 떨어져 몇 시간을 그대로 달린 적도 있었고, 머플러가 고장 나 굉굉한 폭음으로 조용한 동네를 깨운 적도 있었다. 

어디 하나 고장 날 때마다 정비소를 들락 날락거리며 비싼 값을 치를 땐 이러다 주객이 전도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더 달릴 수 있다는 듯 골골대는 몸에 날개를 달고 미친 추진력을 뽐냈다.


그날 역시 우린 녀석과 함께 네카르슈타이나흐(Neckarsteinach)라는 소도시로 향했고 반나절 여행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갈 때만 해도 아무 문제없던 녀석이 집으로 돌아오던 길 갑자기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차는 수동기어였는데 남편이 클러치를 밟으며 기어 변속을 시도했을 때 뭔가 긁히는 소리가 나며 기어 변속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차가 꿀렁거리며 그대로 도로 위에 서 버렸다. 다행이라는 점은 고속도로 위가 아니었다는 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여행을 앞두고 자동차 정기검진까지 마친 상태였기에 처음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부정하고 싶었다.


우리는 창백한 낯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핸드폰을 꺼냈지만, 설상가상 둘 다 인터넷이 잡히지 않았다.

사람도 없고 다니는 차도 없었다.

급한 대로 우리는 자동차 후방에 고장 표지판을 세워 두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마을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했고 혹여나 자동차 정비소가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을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 정비소가 있을 리 만무했고 발만 동동 거리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후광을 업고 달려오는 노란 천사가 보였다.

바로 독일의 도로 위 노란 천사라 불리는 아데아체(ADAC)였다.


아데아체는 긴급출동 SOS라 보면 된다. 보통 타이어 펑크, 배터리 방전과 같은 소소한 장비 고장을 현장에서 수리해 주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차들은 정비소까지 견인 서비스를 해준다. 우리의 경우 당시 아데아체를 가입해 놓지 않았고 존재 정도만 알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래된 중고차를 타면서 아데아체 가입도 안 하고 무슨 깡으로 다녔는지 싶다.


우리는 때마침 순찰 중이던 아데아체를 발견했고 다급히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혹시 갓길에 세워져 있던 차 너희꺼니?"


"어 맞아! 우리 차 망가졌는데 지금 핸드폰도 안 되고 도움이 필요해."


간신히 단어만 띄엄띄엄 내뱉던 시절 우리는 우리 앞에 서있는 천사에게 손짓 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천사는 근처에 견인 서비스 업체에 전화를 걸어 우리의 위치를 알려준 후 날개를 펼치고 가던 길을 향해 떠났다.


그 후에 견인 업체는 몇 가지 확인을 위해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때부터 난관이 봉착됐다.

가뜩이나 콜 포비아가 있는 나는 한국어로도 전화를 기피할 정도인데 당시에 엉망진창 독일어와 갑자기 벌어진 일들로 당황이 더해져 상대의 말이 심각할 정도로 안 들렸다.

차라리 면대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더라면 뉘앙스로라도 알겠는데 전화기 속 상대의 말은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는 내게 현재 위치 파악 및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었을 뿐인데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안 들렸다.

그래서 영어 할 줄 아느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Nein(아니)뿐

남편과 나는 배구공 토스하듯 전화기를 서로에게 넘기며 상대의 말을 파악했고 금액까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집까지 110유로 무조건 현금!


"카드 안돼?"


"응 안돼. 무조건 현금이야. 갈 거야?"


"갈게."


"알겠어. 거기 도착하는데 30분 정도 걸릴 거야"


고작 주고받은 건 몇 문장뿐인데 우린 15분 이상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전화하는 내내 얼굴에서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도 흘렀다.

나였으면 전화를 그냥 끊어 버렸을 거 같은데 그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그리고 예전에 겪은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채팅창을 통해 상담 중이었는데 내가 말을 고르고 고르던 사이 상대는 채팅창을 종료해 버렸다.

그때는 무시당한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언어로 겪는 수난은 하루 이틀도 아니니 그냥 그러려니 심상히 넘겼다.

그날과 비교되며 새삼 차분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눈물 나게 고마웠다.


견인 업체와 전화를 끊은 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현금이 필요하대! 우리 은행 찾아야 해."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은행 찾아 삼만리가 시작된 거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은행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해도 이미 약속 시간을 넘길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은행 찾는 걸 포기하고 차로 달려가기로 했다.

도착하니 역시나 견인 업체가 와 있었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탓에 화가 나진 않았을까 운전석 아저씨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런데 아저씨는 비스듬하게 의자에 기댄 채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우리가 은행을 찾다가 늦었어. 결국 못 찾았는데 혹시 은행 먼저 데려다줄 수 있어?"


물론 이렇게 조리 있게 설명은 못했지만, 단어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은행으로 먼저 갈게."


(와 진작 물어볼걸 이렇게 쿨하다고? 물어보긴 뭘 물어봐. 어디로 향하는 건지도 겨우 전달했는데 은행으로 가 줄 수 있는지 전화로 어떻게 물어봐)


속으로 홀로 독백을 이어가던 중 그가 다시 묻는다.


"너희 000으로 간댔지?"


어랏 내비를 찍는데 우리 주소가 아니다!

우리 집과 한 끗 차이로 유사한 발음의 다른 주소지였다. 발음은 한 끗 차이였지만 거리는 세 배라 340유로의 추가 금액이 붙었다.

다행히 은행에서 출발하기 전에 주소를 확인한 거라 금액을 다시 인출한 후에 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전수도 바뀌었다.

짧은 거리를 운행하고 퇴근하려던 직원은 변경된 노선으로 업체의 사장에게 우리를 맡겼고 우리는 노쇠한 붕붕이를 뒤에 싣고 기진맥진 넋이 나간 채 90Km를 달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돈을 지불하려 할 때 사장님은 420유로만 받았다.


"아까 450유로라고 했는데..."


"음 괜찮아 420유로만 줘."


"고마워요. 운전 조심해요." 


내가 손으로 운전대 잡는 시늉을 했다.

그 와중에 더듬더듬 운전 조심하라는 말을 한 게 웃겼는지 나이 많은 사장님은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녀석은 그렇게 우리와 영영 헤어졌다. 클러치에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후에 시동마저 걸리지 않았고 다시 고쳐 쓴다 해도 이대로는 무리일 듯싶어 우리는 녀석을 보내주기로 했다.

때마침 우체통에는 중고차 판매 광고가 배달되어 왔고 그게 뜻이라 여긴 우리는 업자에게 눈물을 머금고 우리의 녀석을 헐 값에 넘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고 우리는 바깥세상을 더 이상 구경하지 못했다. 그나마 덜 억울했던 건 녀석 덕분에 독일에 오자마자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문득 창문을 보다 당시의 녀석과 색도 모습도 비슷한 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노쇠한 몸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장렬하게 전사한 녀석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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