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길 역주행 5일 차 : A Guardia 까지 43.4km
예약 없이 다니는 자의 말로는 43.4km의 고행.
밤새 잠을 잘 잤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순례길에서 밤새 안 깨고 일어나야 할 시간까지 푹 자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 주로 독실에서 혼자 잤을 때 그럭저럭 잘 잔 듯싶다.
다른 순례자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밴딩머신에서 간단히 라떼 한잔 뽑아 마시고 한국 어르신과 인사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은 적당히 25km 정도 떨어진 곳까지만 가보려고 한다.
동쪽 하늘로 여명이 밝아 온다. 색이 이쁘긴 하지만 뭐 압도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그저 적당히 예쁘다. 해변길로 다시 접어들기 위해서는 언덕밑 마을 쪽으로 다시 한참 내려갔다가 파란 화살표를 찾아 걸어야 한다. 아직 이른 해변 마을은 조용하고 편안하다.
Prado 마을의 해변(쁘라이아 데 쁘라도, 쁘라도 해변)에 도착하니 바다 쪽으로 한참 뛰어 나간 반도 지형의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재밌는 것은 이곳은 아직 스페인 땅이지만 지명을 보면 재밌게도 포르투갈어다. praia(프라이아)는 포르투갈어로 해변이라는 의미고 스페인어로는 playa(쁠라야). 그냥 사투리처럼 쓰는 것인지 아니며 포르투갈어로 불렸던 곳이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곳 사람이 아닌 외지인의 눈으로 보자면 좀 불편함이 있다. 갈리시아 지방에 가면 그냥 또 갈리시아어 표기를 사용하고, 어떤 표지판에는 표준 스페인어, 지역어가 같이 표기되어 있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는 표준어를 공식적인 명칭에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일 수 있겠으나 또 어떻게 보면 지역이 지키고자 하는 자체 전통(혹은 다양성이라고 해야 하나?)을 지킨다고 볼 수도 있어 마냥 불편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파토스(pato는 오리를 뜻하는데, 파토스는 복수형인지 또 다른 의미의 단어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마을을 지나면서 정방향 순례자를 몇 만났고 다음 마을은 San Pedro da Ramallosa(산 뻬드로 다 라마요사)로 이어지는데 해변의 경치가 아름답다.
산 뻬드로 다 라마요스 마을에서 바다로 이어진 강을 건너게 되는데, 무심코 다리를 건너다 순례길 경로에 놓인 로만 브릿지를 놓칠 뻔했다. 요즘 다리와 약간 떨어져 나란히 로만 브릿지를 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좀 떨어진 곳에서 로만 브릿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어서. 다리가 규모가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조형미가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순 있을 것 같다. 교각 부분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였는지 쐐기 모양으로 되어 있고 다리 위쪽까지 그대로 이어져 독특한 쐐기형의 평면을 만들고 있었다. 다리 가운데 십자상에는 매일 누군가 꽃과 촛불이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는 듯했다.
출발 때부터 배가 좀 불편했는데, 마침 바르들이 오픈하고 있어 콜라 한잔 시켜 놓고 볼일도 해결한다. 동네 아재들이 아침부터 맥주를 시켜놓고 수다를 떤다.
O Burgo 마을을 지나 Baiona로 이어지는 골목은 좁지만 정감 넘친다.
오르막의 골목 끝에 이르자 돌 십자가 조형물이 나오는데 Cruceiro da Santísima Trindade(삼위일체의 십자가, 이 명칭은 또 갈리시아어이다. 이곳이 갈리시아 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15세기에 세워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조형물이라고 한다.
삼위일체 십자상을 지나 바이오나 마을 중심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성당이 두 개가 자리 잡고 있는데, Colexiata de Santa María de Baiona(산타 마리아 바이오나 대학 성당)와 Capela de Santa Liberata(산타 리베라따 예배당)가 그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 대칭인 듯 하지만 정확한 대칭은 아니다. 건축학에 대해 잘 모르니 입 닫고 지나치는 게 좋겠다. 12세기에 지어졌으며 14세기에 재건되었었다고 한다.
산타 마리아 성당의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 다시 관리받지 못하는 듯한 성당이 하나 더 보이는데 조형적으로는 더 균형이 잘 잡힌 Capela de Santa Liberata가 눈에 들어온다. 이 예배당은 '바이오나'의 순교자 딸이자 139년에 세계 최초로 십자가에 처형된 여성을 기리기 위해 봉헌되었다고 한다.
조망이 좋은 곳이어서 충분히 시간을 내어 둘러 볼만 하지만, 나는 대강 카메라에 경치를 담고 걷기를 이어간다. 길은 해변을 따라 이어지지 않고 마을의 가장 높은 곳을 넘어가게 된다.
해변 쪽으로 성이 하나 보이고 그 뒤로 지나온 마을들이 보인다. 해변의 성은 국립 파라도르 호텔로 쓰이고 있는 성이라고 한다. 하룻밤 지내기에 매우 좋은 곳일 것이다.
언덕을 넘어가면 작은 해안 마을을 굽어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길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2천 년 전의 로만로드로 이어진다.
인적이 드문 산길로 이어지는데 현재는 해안 쪽으로 도로가 나 있기 때문에 이 길은 순례자와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을 제외하고 이용자는 제한적이다. 사실 도시구간을 제외한 모든 순례길이 그렇긴 하지만 말이다.
언덕 정상부를 지나면 다시 바다풍경이 이어진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와중에 도로 곁을 따라 걷다 보니 좀 지친다. 바르가 없나 찾아보니 바닷가 쪽으로 경사지에 캠핑사이트와 바르를 운영 중인 곳이 있어 콜라와 또르띠야 데 빠따따스를 시켜 파라솔에 앉아 쉬면서 요기를 했다. 또르띠야 데 빠따따스에는 검정색의 탄화된 알갱이들이 있어 걷어내고 먹느라 좀 성가셨다.
9시간쯤 걸었을까? 앱에서 봐두었던 꽤 괜찮아 보이던 알베르게가 있던 Oia에 도착했는데, 초입에 오래된 수도원이 바다와 접해 있었다.
이 수도원은 약 20년에 걸쳐 복구가 되고 있다고 하는데, 몇 년 안에 방문이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 길에서 시그니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부에 순례자용 알베르게를 만든다면 더욱더 말이다.
예약을 권하던 오이아의 알베르게는 만실이었고 나는 앱을 재빨리 켜고 숙박이 가능할 알베르게와 오스뗄,오뗄을 찾기 시작했다. 찾다 찾다 이곳에서 10km 넘게 더 가야 만나는 A Guarda의 오뗄을 어렵게 예약했다. 35유로나 내고... 오늘은 이틀 치 걸었으니 약간의 호사를 누려도 괜찮겠지.
해안을 따라 놓인 도로의 곁길과 그 곁길 안쪽을 넘나들며 길은 지루하게 이어진다. 힘들진 않지만 지겹긴 하다. 음악도 듣고, 유튜브도 들으며 쉬지 않고 걷는다.
1시간 반쯤 걷고 있을 때쯤 갈증은 최고조로 올라와 물을 얻을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고 걷는 즈음 Portecelo 뽀르떼쎌로 라는 마을에 도착, 해변이 보이는 곳에 야외 BAR가 있다. 끌라라 한 병과 아쿠아리우스 한 캔을 시원하게 마셔 재꼈다.
뽀르떼쎌로에서 두 시간쯤 더 걸었을 즈음 오늘의 예약지 A Guarda가 보이기 시작한다. 벌써 시간도 7시를 넘기고 있어 좀 걱정이 되던 참이었는데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 구아르다는 포르투갈과 인접한 스페인서부 해안의 마지막 큰 도시였다. 도시로 들어가기 전 해안에는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고 난 당연히 이곳에서 또 한 번 쉬어 갔다.
번화가로 진입해 오늘 예약한 Hotel Eli-Mar에 도착. 중후한 지배인에게 키를 받고 방에 들어가니 혼자서 쓰기에 차고 넘친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짐 정리를 한 후 멀리 가지 않고 1층 바르에서 메누 델 디아를 시켜 먹고 에스뜨레야 갈리씨아 맥주 한 병을 들고 호텔 앞 도로에 놓인 테이블에서 맥주로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