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순례길에서 밤새 잘 자는 날은 손으로 꼽습니다. 벌써 40여 일을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잠을 온전히 잘 잔다고 하기 어렵습니다만 어제는 제법 잘 잔듯합니다. 어쩌면 저녁에 먹은 타이레놀 때문이었을 듯합니다. 항상 잘 자는 것 같아 부러운 스페인 형님 에밀리오의 코골이는 대단합니다만 잠 기운이 시끄러운 코 고는 소리를 이겼나 봅니다. 매일 25km 이상을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일 육체의 피곤함이 깊은 수면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날은 손에 꼽습니다.
7시 가까이 되었을 때 먼저 길을 나섭니다. 마을을 나서자마자 불빛이라곤 찾기 어려운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마을 공동묘지를 지나야 하는데 랜턴 밝힌 곳만 보여 좀 무섭기도 합니다. 사람보다 큰 선인장이 마치 괴물처럼 무섭게 보입니다. 이럴 땐 그냥 빨리 걷습니다.
길은 사유지인 농장길로 들어서는데 동물의 이동을 막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걸쇠를 걸어 놓고 갑니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소리에 슬쩍 긴장됩니다. 랜턴 빛에 양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철문을 몇 번인가 여닫고 언덕을 오르니 어느덧 8시를 넘기며 동이 터오며 이마와 코에서는 땀이 솟아납니다.
키 낮은 도토리나무 심어진 구릉처럼 이어진 농장에는 군데군데 가축 먹이를 위한 급양대가 설치되어 있다. 사유지를 순례자를 위해 개방하고 공유해 주기 때문에 이렇게 순례자는 아름답고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베리코 돼지는 먹이와 자연 방목 시간에 따라 최고등급인 베요타부터 세보 데 깜뽀, 세보의 순으로 3등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합니다. 베요타는 100% 자연 방목에 도토리만 먹고 자란 경우이며, 세보는 곡물 사료를 먹고 축사에서 사육하는 돼지의 등급이라고 합니다.
도토리나무 숲의 사이 길은 꽤 넓지만 비포장 도로이며 농장을 관리하기 위한 지프형 차량들이 아주 가끔 지나다니는데 차량이 없으면 농장 관리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출발한 지 3시간쯤 지나 중간 마을인 El Real de la Jara에 도착해 요기를 위해 바르를 찾아 기웃거립니다. 채 10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라 점심 식사를 하긴 어렵고 간단하게 보까디요와 콜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합니다. 스페인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먹는 것은 매번 비슷합니다. ^^
마을을 빠져나가면서 보니 마을 언덕 위에는 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의 이름은 Castillo de El Real de la Jara 까스띠요 데 엘 레알 데 라 하라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요새로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복원한 지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요기와 휴식을 충분히 하고 난 후 다시 길을 나서는데 나보다 늦게 출발했던 에밀리오가 앞에 보입니다. 길 모퉁이를 살짝 돌자 Castillo de las Torres (Ruinas) 까스띠요 데 라스 또레스라는 무너진 체 방치된 오래된 성 유적이 길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성은 4개의 탑이 있던 14세기말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중세 요새라고 합니다.
목적지인 모네스떼리오까지는 아직 20여 km를 더 가야 하는데, 중간에 서비스 시설이 있는 마을이 지도상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0km쯤 걷자 본 선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뜬금없이 그릴 레스토랑이 있어 콜라 한잔과 함께 잠시 쉬어 갑니다. 에밀리오도 역시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이 스페인 형 혹시 알코올 중독은 아니겠지요?
아직도 남은 길은 10km 이상인데, 길은 완만한 경사를 계속 올라가는 형태입니다. 중간에 독특하게 생긴 San Isidro(이시드로 성인)의 예배당과 작은 예배당 말고 딱히 볼 것이 없는 길을 걷습니다. 큰 도로와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길은 계속 위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르도 없습니다.
한강 자전거 길에 있는 아이유 고개도 아니고 다 올라왔다 싶으면 또 그 위에 고개가 이어지길 여러 차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이어나간 끝에 마지막 언덕 정상인 Cruz del Puerto가 있는 공원에 도착합니다. 피크닉을 할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어진 곳인데, 관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가방을 뒤져 먹을 것들을 찾아 먹으며 좀 쉬어 갑니다.
모네스떼리오에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에밀리오는 벌써 도착해 맥주에 저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선 씻고 빨래를 널고, 알베르게 바로 옆의 마트에서 맥주와 귤, 토마토, 고기완자 캔, 유사 즉석밥을 사 와 계란후라이를 넣은 잡탕밥 비슷하게 만들어 맥주에 곁들입니다. 후식으로 잘 익은 토마토를 썰어 설탕을 뿌려 먹었습니다. 도보 여행자에게는 넘치는 저녁입니다.
5일 차 구간은 그론세(Gronze) 앱에서 20km를 제안하지만 알베르게 사정으로 26km 지점까지 가기로 합니다. 마을 끝 운동장을 지나 좌회전을 하면 본격적인 시골길입니다. 어둡기 때문에 걷기 시작하여 1시간 정도 될 때까지는 그저 랜턴빛만 의지해 열심히 걷습니다.
동이 터오지만 황홀한 일출은 없습니다. 조금 발간 오렌지 빛 여명이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길 왼쪽 먼 시야로 제법 큰 마을이 보입니다. 중심에는 역시 성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마을들은 대개 이런 식입니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방향을 안내하는 은의 길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표시석 위에 누군가 양 대가리 뼈를 올려놓았습니다. 에이.... 2016년 처음 프랑스 길을 걸을 땐 노란 화살표 말고는 다른 표식을 본 기억이 없는데, 북쪽 길과 은의 길을 지나며 노란색과 민트색의 표지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로만 로드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만 기억은 항상 정확하진 않습니다.
제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길을 한참이나 걷습니다. 거의 15km를 걷고 있지만 마을도 바르도 없습니다. 나를 앞질러간 순례자 한 팀이 있을 뿐입니다.
20km 가까이 걸어 도착한 푸엔떼 데 깐또스에 도착해 바르부터 찾아봅니다. 아침도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도 먹어 에너지 상태를 다시 높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마구 듭니다. 마을 광장에 접해있는 바르로 들어갑니다. 식사는 아직 안되고 만들어 놓은 간식류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카운터에 접해있는 조리 및 보관 장소에는 돼지 간 등의 부속을 벌겋게 볶아 놓은 듯한 음식이 보이길래 콜라와 함께 주문해 봅니다. 튀긴 감자와 같이 한 접시 푸짐하게 내어준 음식은 돼지 간이 맞습니다. 맛이 제법 있습니다. 스페인에는 돼지 부속으로 만드는 음식 중에 엠부띠도스 embutidos라고 적어 놓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엠부띠도스는 돼지 창자 등에 내용물을 넣어서 만드는 초리소, 살치촌 같은 소시지 비슷한 것부터 하몬, 로모 등의 돼지고기 가공품 등을 통칭해서 말합니다. 돼지 귀, 돼지 간 등도 타파스로 제공하는 바르도 제법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의탁할 깔사디야 데 로스 바로스까지는 다시 6km 정도를 더 걸어갑니다. 봄에 밀을 키우고 수확했을 넓은 초지를 지나 멀리 보이는 거대한 황소(황소 조형물)를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며 걷다 보니 도착합니다. 마을 중심 광장을 지나 약간 언덕 위 외곽에 자리한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먼저 자리 잡은 순례자가 한 팀 있습니다. 원래 마을 관청(동사무소?)에서 열쇠를 받아 와야 했으나, 미리 확인하지 않고 알베르게로 와버렸는데 다행히 먼저 온 순례자가 있어 일단 자리를 잡습니다. 침대를 고르고 씻고 빨고 나서야 알베르게 벽에 붙은 안내 종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합니다. 올라! 요 소이 뻬레그리노.라고 말하니 뭐라 뭐라 합니다. 나중에 와서 등록하겠다는 내용인 듯합니다. 영어를 못해도, 스페인어를 못해도 몇 가지 문장과 단어만 외우고 일단 내가 필요한 말만 하면 대략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 있습니다. 진짜 가끔 전화를 해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도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알베르게는 신축해 시설은 좋습니다만 부엌에 먹을 것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저보다 늦게 온 스페인 청년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마을 알베르게로 이동합니다. 가난한 순례자는 선택의 폭이 적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구글 맵을 켜고 식당을 찾아봅니다만 저녁 시간은 아직 멀었습니다. 일단 나가서 문을 연 바르에 들어가 식사가 되는지 물어봅니다. Puedo comer algo? 뭔가 식사할 수 있습니까? 물어보니 보까디요만 된다고 합니다. 하몬 보까디요와 캔 콜라 2개를 받아 생각보다 맛있던 보까디요는 반만 먹고 반은 냅킨에 싸서 가지고 옵니다. 내일 아침에 식사할 곳을 찾지 못할 수 있으므로 일종의 비상식량입니다.
알베르게에 앉아있다 저녁 노을빛이 심상치 않아 카메라를 들고 문밖으로 나갑니다. 와우... 이런 노을은 처음 경험합니다. 네온 빛의 서치라이트를 비추는 것 같습니다. 황홀한 저녁 하늘은 또 하나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