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 길, 눈으로 걷는 순례길 2

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by 감뚱

07.2-3 사프라, 비야프란까 데 로스 바로스


■ 6일 차 - Calzadilla de los Barros ~ Zafra

깔사디야 데 로스 바로스 ~ 사프라

18km


깔사디야 데 로스 바로스는 순례자가 많이 머무는 마을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알베르게 도착하면 7팀 정도는 늘 있었는데 말입니다. 슈퍼마켓이 없는 마을에서는 미리 먹을 것을 좀 준비하지 않으면 반나절을 굶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어제 바르에서 획득한 보카디요가 맛까지 나쁘지 않아 참 다행이었습니다. 돌체 구스또 까페 라떼 한잔과 설탕 토마토로 간단히 아침을 챙기고 여유 있게 길을 나섭니다. 아직 어둡습니다.

사람 구경하기 힘든 마을. 어디나 비슷하다.
황량함이 넓이로도 느껴집니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걷기에 매우 좋은 평평한 길을 한참 걷습니다. 전후방 1km 내에는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90%쯤 될 것 같은 길에서 좋은 점은 시야가 앞뒤로 몇 킬로미터에 이르지만 노상 방뇨가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어디서 하루를 보내고 나타났는지 모를 프랑스 부부 순례자를 오늘 아침에 또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3번째 순례길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부 순례자는 어디서 묵었던 걸까요? 아침에 내 앞에 또 나타납니다.
길옆 포도밭에서 딴 포도송이를 웃으며 나에게 건네주고 간 프랑스 순례자 부부. 나를 포도서리의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주 볼 수 있었던 포도밭은 이미 수확이 끝났음에도 길 가의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남아 있었는데, 아마도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마르고 힘든 순례자에게는 그야말로 포도당의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은의 길에서는 지평선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한동안 걷고 나서야 멀리 산초 페레스 마을이 보입니다. 보인다고 금방 도착할 순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데 바로 닿지 못할 때 감정적으로는 더 힘들기도 합니다.

기찻길 끝으로 산초 페레스 마을이 보이기 시작

마을 중심부에는 오랜 된 듯 바래고 여러 번 보수가 이루어진 듯한 오래된 성당 Parroquia de Santa Lucía가 있어 한 바퀴 천천히 돌며 구경해 봅니다. 15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설된 성당이라고 하는데 성당의 종탑 윗부분은 17세기 무데하르 양식으로 개축되었다고 합니다. 6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꽤 유서 깊은 성당이었습니다. 성당을 둘러보고 배가 고파 바르를 찾아봤지만 문을 연 곳은 없습니다.

Parroquia de Santa Lucía 산따 루씨아 교구 성당

와인이 유명하거나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가 봅니다. 와인 모양의 상징이 마을 끝에 서 있길래, 지나가던 처음 보는 프랑스 누님 순례자에게 부탁해서 사진 한 장을 남겨 봅니다.

45일 정도 걸어서 인지 살이 많이 빠진 모습

다행히도 오늘의 종착지인 사프라까지는 1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멀리 왼쪽으로 낮지만 왠지 웅장해 보이는 산을 끼고 있는 꽤 커 보이는 Zafra 시야에 들어옵니다.

지도를 찾아봐도 산의 이름이 딱히 보이진 않습니다. 그냥 Mirador(전망 장소)라고만 적혀있습니다.
사프라 마을의 초입 풍경

사프라는 꽤 규모가 있는 마을입니다. 투우 경기장도 있고 오래된 커다란 성당과 국립 빠라도르 호텔도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의 알베르게에 왔는데 고흐랑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관련한 서적과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습니다. 알베르게 2층 침대의 매트리스는 스프링이 들어가 있어 탄탄한 편이지만 많이 낡았고, 특히 화장실 겸 샤워실이 1개라 불편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솔직히 추천하지 않습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또 다른 알베르게나 파라도르 호텔을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지 싶습니다.

15기에 지어진 페리아의 첫 번째 백작인 로렌소 수아레스 데 피케로아가 건설한 Palacio de los Duques de Feria
페리아 공작 궁전은 방어용 성채의 역할보다는 귀족의 위엄을 드러내는 거주용 궁전의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Parador de Zafra (사프라의 빠라도르)로 사용 중입니다. 4성급 호텔로 평일 70유로 정도인 듯합니다.
Iglesia de la Candelaria 사프라의 대성당이라는 별칭을 가졌지만 현재는 교구 소속의 성당

오늘 걸은 길이가 짧은 덕분에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봅니다. 걷다 보니 Museo Santa Clara(산따 끌라라 박물관)이 눈에 띄어 들어가 봅니다. 입장료는 받지 않습니다. 이곳은 페리아 가문의 안식처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가문의 전용 성당이자 가족 묘역이며 산타 마리아 데 라 바예 수도원의 한 부분입니다. 현재도 봉쇄 수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 박물과 투어를 통해서만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신비로운 공간입니다. 화려한 성물들과 내부 공간(중정, 성당 등)을 볼 수 있습니다.

Museo Santa Clara
Museo Santa Clara
Museo Santa Clara 수도원 성당의 모형
Museo Santa Clara


마을 공원이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을 구경을 마치고 알베르게 근처 바르에서 메뉴 델 디아를 11유로에 먹었는데 와인을 포함해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첫번째 접시 마카로니 샐러드 진짜 맛있었고 두번째 접시 닭다리 구이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후식의 아이스크림 까지도...
알베르게 뒤로 펼쳐진 저녁 노을이 감동 입니다.

■ 7일 차 - Zafra ~ Villafranca de los Barros

사프라 ~ 비야프란까 데 로스 바로스

21km


은의 길에서 처음 비를 만났습니다. 비를 좋아하긴 하지만 매일 같은 신발을 신고 걸어야 하는 이 길에서는 뭔가 젖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갈리시아에 가까워져서인지 아니면 우기에 가까워서인지 앞으로 10일 정도 비가 자주 내린다는 예보에 신경이 좀 쓰입니다.

Parroquia de la Candelaria 성당의 조명 색이 참...
새벽에 보는 Palacio de los Duques de Feria은 왠지 더 은근한 매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요.

시내를 빠져나가는 길 끝에 "산 프란씨스꼬 또레 Torre de San Francisco"가 탑 부분만 남아 배웅을 해줍니다. 탑을 지나면 한가한 시골길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이어지는 오르막을 4km쯤 걸으며 정상에 도착하는데 정상에서의 시야가 좋아 진행 방향으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을 보며 잠시 쉬어 갑니다.

Torre de San Francisco
Los Santos de Maimona
바위에 새겨진 노란 조개 표시
Los Santos de Maimona
Nuestra Señora de los Ángeles 천사들의 우리 성모님이라는 이름의 성당

성당 바로 옆에 Gastrobar Los Ángeles라는 까페에서 치즈, 햄 토스트와 까페 꼰레체를 2.2유로에 획득했습니다. 정말 저렴하지만 맛있는 아침 세트였습니다.

2.2유로의 조식 세트
건물 색이 예뻐서

야트막한 올리브 농장 사잇길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말도 만나고 노새(당나귄가?)도 만납니다. 사람보다 동물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말의 갈기를 예쁘게 따았다. 주인이 동물을 참 사랑하나 봅니다.
당나귀?
만난 적 없는 순례자가 홀로 걷습니다. 주황색 배낭 커버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잘 익어가는 올리브 열매
올리브 농장
농장사이의 이 황톳길은 사실 사유지입니다. 순례길은 이렇게 사유지를 통과하는 구간이 많습니다.
초원
농장 안의 길과 표지석

한 10km 넘게 걷는 동안 계속 비슷한 풍경입니다. 예전엔 이 농장 안에 집에서 농부들이 살았었나 봅니다. 그러다 마을로 집을 옮기고 차를 이용해 농사를 지으러 다니는 것 같습니다. 폐허가 되어가는 집들이 종종 농장 사이로 보입니다.

농부가 살았을 집. 지붕 기와가 먼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비가 굵어지며 바닥의 진흙이 신발 바닥에 두껍게 들러붙어 걸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도 비가 세차게 내리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목적지 입구에 도착합니다. 그론세 앱에 소개된 알베르게 광고를 봤음에도 엉뚱한 곳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마을 중심이 아닌 큰 도로가 있는 마을 사이드 끝에 있는 La Marina Pencion이라는 이름의 식당 겸 숙소에 듭니다. 아마도 어제 그제 못 만난 에밀리오 형이 텔레파시를 보냈나 봅니다. 식당에서 에밀리오 형을 만났습니다. 식당에서 10유로의 메뉴 델 디아를 맛있게 먹습니다. 와인과 달걀 프라이, 생선 튀김, 멜론까지 꽤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아마도 배가 고파서였겠지요?

10유로의 식사치고 가성비 좋은 편 입니다.
숙소 전경

에밀리오와 함께 쓰게 된 방은 편리하지 못해 젖은 옷 말릴 공간도 부족했고 좁았으며 많이 부실합니다.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40km 이상 걸어야 하는 메리다의 호텔 독방을 예약해 버립니다. 에밀리오가 내 계획을 듣더니 불가능하다며, 날 설득하지만 난 이미 예약을 했고 게다가 대한민국 방위를 마친 50대 초반 아저씨라 문제없습니다.

에밀리오의 계획표

에밀리오는 자기가 만든 계획표까지 보여주며 나의 메리다행을 만류했지만, 난 꼭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참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축구 중계를 보는 에밀리오... 아 시끄럽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