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깔사디야 데 로스 바로스는 순례자가 많이 머무는 마을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알베르게 도착하면 7팀 정도는 늘 있었는데 말입니다. 슈퍼마켓이 없는 마을에서는 미리 먹을 것을 좀 준비하지 않으면 반나절을 굶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어제 바르에서 획득한 보카디요가 맛까지 나쁘지 않아 참 다행이었습니다. 돌체 구스또 까페 라떼 한잔과 설탕 토마토로 간단히 아침을 챙기고 여유 있게 길을 나섭니다. 아직 어둡습니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걷기에 매우 좋은 평평한 길을 한참 걷습니다. 전후방 1km 내에는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90%쯤 될 것 같은 길에서 좋은 점은 시야가 앞뒤로 몇 킬로미터에 이르지만 노상 방뇨가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어디서 하루를 보내고 나타났는지 모를 프랑스 부부 순례자를 오늘 아침에 또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3번째 순례길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주 볼 수 있었던 포도밭은 이미 수확이 끝났음에도 길 가의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남아 있었는데, 아마도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마르고 힘든 순례자에게는 그야말로 포도당의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한동안 걷고 나서야 멀리 산초 페레스 마을이 보입니다. 보인다고 금방 도착할 순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데 바로 닿지 못할 때 감정적으로는 더 힘들기도 합니다.
마을 중심부에는 오랜 된 듯 바래고 여러 번 보수가 이루어진 듯한 오래된 성당 Parroquia de Santa Lucía가 있어 한 바퀴 천천히 돌며 구경해 봅니다. 15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설된 성당이라고 하는데 성당의 종탑 윗부분은 17세기 무데하르 양식으로 개축되었다고 합니다. 6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꽤 유서 깊은 성당이었습니다. 성당을 둘러보고 배가 고파 바르를 찾아봤지만 문을 연 곳은 없습니다.
와인이 유명하거나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가 봅니다. 와인 모양의 상징이 마을 끝에 서 있길래, 지나가던 처음 보는 프랑스 누님 순례자에게 부탁해서 사진 한 장을 남겨 봅니다.
다행히도 오늘의 종착지인 사프라까지는 1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멀리 왼쪽으로 낮지만 왠지 웅장해 보이는 산을 끼고 있는 꽤 커 보이는 Zafra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사프라는 꽤 규모가 있는 마을입니다. 투우 경기장도 있고 오래된 커다란 성당과 국립 빠라도르 호텔도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의 알베르게에 왔는데 고흐랑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관련한 서적과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습니다. 알베르게 2층 침대의 매트리스는 스프링이 들어가 있어 탄탄한 편이지만 많이 낡았고, 특히 화장실 겸 샤워실이 1개라 불편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솔직히 추천하지 않습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또 다른 알베르게나 파라도르 호텔을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지 싶습니다.
오늘 걸은 길이가 짧은 덕분에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봅니다. 걷다 보니 Museo Santa Clara(산따 끌라라 박물관)이 눈에 띄어 들어가 봅니다. 입장료는 받지 않습니다. 이곳은 페리아 가문의 안식처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가문의 전용 성당이자 가족 묘역이며 산타 마리아 데 라 바예 수도원의 한 부분입니다. 현재도 봉쇄 수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 박물과 투어를 통해서만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신비로운 공간입니다. 화려한 성물들과 내부 공간(중정, 성당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을 구경을 마치고 알베르게 근처 바르에서 메뉴 델 디아를 11유로에 먹었는데 와인을 포함해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은의 길에서 처음 비를 만났습니다. 비를 좋아하긴 하지만 매일 같은 신발을 신고 걸어야 하는 이 길에서는 뭔가 젖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갈리시아에 가까워져서인지 아니면 우기에 가까워서인지 앞으로 10일 정도 비가 자주 내린다는 예보에 신경이 좀 쓰입니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길 끝에 "산 프란씨스꼬 또레 Torre de San Francisco"가 탑 부분만 남아 배웅을 해줍니다. 탑을 지나면 한가한 시골길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이어지는 오르막을 4km쯤 걸으며 정상에 도착하는데 정상에서의 시야가 좋아 진행 방향으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을 보며 잠시 쉬어 갑니다.
성당 바로 옆에 Gastrobar Los Ángeles라는 까페에서 치즈, 햄 토스트와 까페 꼰레체를 2.2유로에 획득했습니다. 정말 저렴하지만 맛있는 아침 세트였습니다.
야트막한 올리브 농장 사잇길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말도 만나고 노새(당나귄가?)도 만납니다. 사람보다 동물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한 10km 넘게 걷는 동안 계속 비슷한 풍경입니다. 예전엔 이 농장 안에 집에서 농부들이 살았었나 봅니다. 그러다 마을로 집을 옮기고 차를 이용해 농사를 지으러 다니는 것 같습니다. 폐허가 되어가는 집들이 종종 농장 사이로 보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비가 굵어지며 바닥의 진흙이 신발 바닥에 두껍게 들러붙어 걸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도 비가 세차게 내리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목적지 입구에 도착합니다. 그론세 앱에 소개된 알베르게 광고를 봤음에도 엉뚱한 곳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마을 중심이 아닌 큰 도로가 있는 마을 사이드 끝에 있는 La Marina Pencion이라는 이름의 식당 겸 숙소에 듭니다. 아마도 어제 그제 못 만난 에밀리오 형이 텔레파시를 보냈나 봅니다. 식당에서 에밀리오 형을 만났습니다. 식당에서 10유로의 메뉴 델 디아를 맛있게 먹습니다. 와인과 달걀 프라이, 생선 튀김, 멜론까지 꽤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아마도 배가 고파서였겠지요?
에밀리오와 함께 쓰게 된 방은 편리하지 못해 젖은 옷 말릴 공간도 부족했고 좁았으며 많이 부실합니다.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40km 이상 걸어야 하는 메리다의 호텔 독방을 예약해 버립니다. 에밀리오가 내 계획을 듣더니 불가능하다며, 날 설득하지만 난 이미 예약을 했고 게다가 대한민국 방위를 마친 50대 초반 아저씨라 문제없습니다.
에밀리오는 자기가 만든 계획표까지 보여주며 나의 메리다행을 만류했지만, 난 꼭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참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축구 중계를 보는 에밀리오... 아 시끄럽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