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에밀리오의 축구중계와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하아... 코골이 때문에 양압기를 휴대하고 다니는데 양압기 소리도 작진 않습니다. 4시에 일어나 고양이 세수하고 4시 30분에 출발하려고 나섰는데 출입구가 잠겨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당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보지만 열리진 않습니다. 대략 난감했습니다. 랜턴을 켜고 식당 카운터를 살피니 열쇠가 하나 보입니다. 열쇠를 들고 원래 출입문이 아닌 길 쪽으로 난 유리문을 여는데 성공하고 열쇠는 제자리에 놓고 문을 잘 닫은 후 길을 나섭니다. 마을 중심부로 이동해 길을 찾아 걷는데 환하게 불을 켠 곳에 깨끗해 보이는 호텔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묵을걸 그랬나 봅니다.
순례길 라인을 찾아 가는데 마을 왼쪽 끝에서 마을 오른쪽 끝까지 거의 800m쯤 걷습니다. 지난밤 숙소를 영 잘못 잡은 듯합니다. 마을 끝쯤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온통 하얗게 칠해진 성당을 만났는데 많이 낯설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나자 바로 암흑입니다. 멀리 동쪽 하늘 방향이 사진으로는 좀 밝게 찍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둡습니다. 핸드폰과 카메라의 반사식 노출방식으로 인한 노출 방식의 부정확함 때문에 밝게 찍혀 사진상으로는 좀 더 극적으로 보이는 듯합니다.
동터오는 하늘의 멋진 일출을 기대했지만 뭐 그냥 그런 아침 풍경이 되었습니다.
약 20km쯤 걸어오니 멀리 다음 마을로 생각되는 동네가 멀리 보입니다. 마을 이름은 'Torremejía 또레메히아'이고 보통 이곳에서 하루 쉬어가는 곳 입니다만 메리다에 호텔을 예약했기에 이곳에서는 식사만 할 예정입니다.
약 7km를 더 걸은 후에야 마을에 도착합니다. 문 연 식당을 찾아 메누 델 디아를 주문하니 야채 스프(차가운 스프)에 돼지고기구이를 내어 줍니다. 케첩 맛이 좀 나는 차가운 야채 스프는 생각보다 맛있습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11유로를 지불합니다. 27km를 걷고 나서야 먹는 첫끼는 맛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콜라까지 한 캔 더 마시고 충분히 쉬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갈래길에서 아무 생각 없이 걷다 알바를 합니다. 20분 정도 손해 봤습니다. 메리다까지는 지속적인 내리막인데도 가끔씩 얕은 언덕이 나타나면 숨이 찹니다. 참 체력이 저질입니다. 메리다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41km 지점까지 걷자 드디어 메리다를 가로지르는 과디아나 강에 도착합니다. 강변에 조성된 벤치에서 등산화와 양말까지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2천 년 전 서로마 제국의 중심 스페인에 만들어진 로마의 도시 메리다를 강 건너에서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차량 통행은 불가하고 사람만 자유롭고 안전하게 건너 다닐 수 있습니다. 길이는 약 8백여 미터로 상당히 깁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의 국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아마도 이 다리도 로마군이 건설했을 텐데, 당시의 로마군인은 군인과 건설 노동자 등 로마제국의 유지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1시간 넘게 42km 정도 걸어 예약한 호텔 독방에 짐을 풀고 잠시 쉬다 저녁을 먹으러 나옵니다. 주변에 디아나 신전을 비롯해 유적들을 둘러봅니다. 규모는 작지만 교과서에서 보았던 신전이 규모는 작지만 같은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로마제국이 도시는 조성하고 이슬람 세력 아래에서 신전의 석재가 뜯겨나가 이슬람 사원석재로 또다시 가톨릭세력에 의해 궁전의 석제로 사용되다 지금은 다시 복원과정을 거쳐 원래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엑스트레마두라 지방의 주도인 메리다는 흔히 '스페인 속의 작은 로마'로 불렸다고 합니다. 기원전 25년,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이베리아 반도 정복 전쟁을 마친 로마 제국 군대의 퇴역 군인들의 정착지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도시의 원래 이름은 '에메리타 아우구스타(Emerita Augusta)'였다고 하며 '에메리타 Emerita'는 '명예롭게 은퇴한'이라는 뜻이며 오늘날 '메리다'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극장, 로마교, 디에나 신전, 원형 경기장, 수도교 등의 유적이 로마를 제외하고 가장 보존 상태가 뛰어난 로마유적이라고 합니다.
무리해서 걷다 보니 시간이 좀 늦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해 원형경기장 등은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ㅠㅠ
정말 깊고 긴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짐을 정리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어제 지나왔던 강 쪽으로 이동 후 표지를 따라 다음 코스로 이동하며 경로상에 있는 어제 보지 못했던 로마 유적을 찾아보며 걷습니다.
로마교 진입로 근처에서 독특한 조형물을 발견했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버려졌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아남아 로마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로마 제국의 건국 신화인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 형제의 전설을 형상화한 조형물입니다. 현대에 설치된 것으로 메리다가 로마 제국의 계획도시로 탄생했음을 기념하고, 이탈리아 로마 시와의 역사적 유대감을 기리기 위해 로마 시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역사는 원주민이었던 이베리아족, 북쪽에서 내려온 켈트족, 로마, 서고트족, 이슬람 세력, 다시 스페인 가톨릭 세력의 역사로 그 주체를 정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포기한다면 온전한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역사는 완성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천 년 전 혹은 중세 이전까지 영토 전체를 아우르는 현대적인 의미의 국가의식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진 않지만 말입니다.
얼마간 걷다 보니 장엄한 건축물이 보입니다. '로스 밀라그로스 수도교(Acueducto de los Milagros)'는 도시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프로세르피나(Embalse de Proserpina)에 저장된 물을 메리다 시내로 끌어오는 역할을 하며 실제 길이는 굴곡 때문에 1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진, 전쟁, 풍파를 겪으면서도 남은 구조물이 기적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최고 높은 부분은 25m에 이릅니다.
감탄을 연발하며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다. 길을 이어나갑니다.
하루쯤 머물며 역사의 숨결을 느끼면 좋았을 텐데, 바쁜 일도 없고 주어진 일도 없는 여행자는 잠깐 스치듯 지나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