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중간에 한번 깨지도 않는 깊은 잠은 또 오랜만입니다. 여유로운 준비를 하고 느지막이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알후쎈이라는 마을까지 20km 정도만 걸을 예정입니다.
메리다를 빠져나오며 길고 완만한 오르막이 있는데, 오르막 정상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로마가 만든 댐으로 생긴 호수가 보입니다. Presa Romana de Proserpina 쁘로세르삐나의 로마 댐입니다. 서기 1~2세기 사이에 건축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가동 중인 댐 중 하나라고 합니다. 2천 년 된 댐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댐도 놀랍지만 여기서부터 메리다까지 5km가 넘는 거리를 연결하는 Los Milagros(기적의 수도교)는 더 놀랍습니다.
쁘로세르삐나의 로마 댐은 메리다 고고학 유적군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댐은 길이가 약 427m, 높이는 약 21m에 달하는 지중해 지역에 있는 고대 탬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 하나라고 합니다.
메리다를 벗어나면 키 작은 도토리나무가 자라고 있는 초원으로 진입합니다. 흑우 무리는 스페인에 와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상에서 '흑우'라는 표현은 호구를 뜻하는 용어로 많이 쓰이는데, 아마도 호구라는 표현이 금지어라서 발음이 비슷한 '흑우'로 썼다는 설이 있습니다.
절반 조금 넘게 걸었나 싶었는데 중간 마을인 엘 까라스깔레호 마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마을 중심에 독특한 모양의 Iglesia de Nuestra Señora de Consolación 이 있습니다. 마을 끄트머리에 식당이 있어 점심을 해결하고 이동합니다.
알후쎈에 도착해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있습니다. 순간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알베르게 창에 붙은 안내에 아래쪽 바르에 열쇠가 있다 적혀 있어 가봤습니다만 바르는 문을 닫았습니다. 다음 마을까지는 너무 먼데라는 생각을 하며 마을 중심의 문을 연 바르에 들어가 일단 맥주 한 캔 합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간단한 안주거리도 주십니다. 알베르게에 대해 어찌어찌 물어보니 알베르게 관리하는 분에게 전화를 해주십니다. 알베르게 오픈했다고 가보랍니다. 알베르게 올라가는 왼쪽 문 닫은 상점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알베르게 접수를 받아 주십니다. 알베르게 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입구를 잘못 찾은 겁니다. 건물의 오른쪽 끝에 입구가 따로 있었습니다. 알베르게에는 먼저 온 커플이 있었고, 나보다 늦은 스페인 중년 아저씨 이렇게 4명이 묵습니다. 방이 몇 개 있어 독실처럼 이용합니다. 샤워하고, 라면 하나 먹고 4인 침실에 혼자 눕습니다. 에고 편하다. 잠시 누웠다가 마을 성당구경을 나갑니다. 마침 문이 열려있어 성당 안쪽도 구경합니다. 성당은 1400년대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오래된 성당은 외관이 독특했는데, 정면과 옆면의 출입구 부분의 조각이 소박하지만 꽤 정성 들여 만들어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침대에 누웠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숙소 유리창을 통해 비가 그치고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하루를 마칩니다.
이제 10일 차에 접어든 은의 길 이번 여행의 목적은 건강이었는데... 살은 확실히 빠졌지만 근육 운동 없이 살만 빠져 사람이 쪼글쪼글해져서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베르게 사정이 어떤지 정확하지 않고 중간 마을 상황도 애매하여 오늘 35km 정도를 걸어야 해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는데, 완전히 어두운 상태에서 두 시간 넘게 걸어야 했습니다.
인적 드문 길을 18km쯤 걸은 후에야 첫 번째 마을인 알꾸에스까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가야겠습니다.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따라 길이 이어집니다. 마을 초입 쪽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가난한 자들의 노예(Esclavos de María y de los Pobres)'라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도나띠보 알베르게라고 합니다. 보통 그론세 등의 앱에서는 메리다에서 이곳까지 38km를 한 코스로 안내합니다만, 저는 전날 42km를 넘게 걸어 끊어 가다 보니 머무르지 못한 숙소입니다.
다행히 입구 쪽에 꽤 큰 식당이 있어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라이터를 잃어버려서 식당 종업원에게 라이터 하나 사서 식전 연초를 즐기고, 메뉴 델 디아를 간단하게 먹고 나왔습니다. 마을이 끝나가는 지점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찾으니 오 마이 갓... 카메라를 두고 왔습니다. 뛰어 되돌아가 테이블에 가보니 아직 치우지 않은 접시들이 놓인 식탁의 의자에 아직 할부도 안 끝난 카메라가 놓여있습니다. 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전엔 비가 좀 흩날렸는데, 오후 들어 날씨가 개어 다행입니다. 한 시간 넘게 걸어 두 번째 마을인 Casas de Don Antonio가 보입니다. 마을 입구에는 강이라고 하기엔 폭이 좁은 강위로 로마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마을을 지나면 광활한 초지가 펼쳐지고 그 초지에는 역시 소들이 주인공입니다. 스페인의 보통 식당(고급 식당을 이용하지는 못했어서...)에서 먹을 수 있는 스테이크나, 갈비구이, 찜 같은 것을 먹을 때 보통 그 고기들은 매우 질긴 편입니다. 우리나라의 소고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저렴한 이유도 아마 맛이 별로라서 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 다리를 다시 만납니다. 물도 거의 없는 또랑 위로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는 다리만 있고 길은 연결되지 않습니다. 로마 가도의 흔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꽤 중요한 유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리 근처에서 밀리아리오(Miliario)를 볼 수 있었는데, 은의 길 로마가도에서는 이런 밀리아리오를 꽤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로마 밀리아리오는 로마시대의 1마일인 1480m마다 한 개씩 세워졌다고 합니다. 밀리아리오는 보통 높이가 2~4m이고, 지름 50~80cm 정도의 원통형 화강암 기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알베르게 열쇠를 받기 위해 알베르게 앞의 베가스 레스토랑에 들러야 했습니다. 여기서 체크인을 하고 6유로 지불. 열쇠를 받았는데 순례객은 나 혼자. 앤초비 타파스에 맥주 한잔 마시고 알베르게로 왔습니다.
먹을 것이 좀 있나 찾아봤지만 뭐 없습니다. 파리가 많아 알베르게에 있는 에프킬라 비슷한 약을 뿌려서 그 숫자를 줄여 봅니다. 방이 2개 있는데 작은 방은 아래 사진의 왼쪽 앞 창 뚫린 방으로 2층 침대가 2개 있고 끝에 방은 좀 더 많았습니다. 혼자자야하니 작은 방에서...
씻고 빨래 몇 개 하고 라면 한 개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대강 저녁을 해결했습니다. 석양이 매우 화려해서 카메라를 챙겨 나갔는데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해가 떨어진 아홉 시가 넘어서도 다른 순례자는 오지 않습니다. 내일은 어디까지 가야 하나 고민해 봅니다. 순례길에서는 뭐 다른 생각하는 일이 별로 없이 단순합니다. 내일은 어디까지 갈까? 힘드네, 밥 먹야 하는데, 슈퍼마켓에선 장을 봐야지, 까페 꼰 레체 한잔 마셔야 하는데, 힘드네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단순해지니까.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집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좋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걸어서 채워나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