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출발지인 세비야에서 이곳 알데아 델 까노까지 열흘 동안 누적거리로 285km를 걸어왔습니다. 일평균 28km 정도 걸은 셈인데 처음 걷는 사람이라면 좀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북쪽길에 이어 40일을 넘게 걷고 있는 입장에서는 적당한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1일 걷는 구간을 20~25km 정도로 매일 걸을 수 있도록 제안하고 있지만 알베르게 사정이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어제 35km를 걸었지만 숙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몸 상태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5시 반쯤 일어나 준비하고 6시 반쯤 길을 나서는데 몸은 아무 저항이 없습니다. 다만 나서는 길이 아직 너무 어두울 뿐입니다. 간간히 뿌리는 매우 어두운 길을 2시간 넘게 걷고서야 동이 트기 시작합니다. 비 때문에 비닐봉지로 싸맨 카메라를 꺼내 동트는 풍경을 담습니다.
세 시간 넘게 걷고서야 중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발데사로르 VALDESALOR'라는 이름의 동네인데 왠지 바르가 하나쯤은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을 근처에 'Puente Mocha 모차 다리'라는 이름의 중세 다리가 있는데, 처음엔 로마제국이 이후 중세와 근대에 개축이 이루어졌고 아래쪽에 사용된 석재는 로마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아치가 10개가 넘지만 지금은 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또랑 수준이고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라고는 동네 농부와 순례자뿐입니다.
마을로 들어가 바르를 찾아 들어가 까페 꼰 레체와 또스따다(토스트)를 주문해 먹는데 커피도 또스따다도 맛이 없습니다만 2.8유로라 가격을 고려한다면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맛없었던 아침을 뒤로하고 경치라고 할 만한 곳이 없는 지루한 길을 다시 10km 넘게 지루하게 걷는 동안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큰 소리로 웃는 청년 순례자 몇을 봅니다. 젊음은 참 좋지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멀리 'Cáceres 까세레스'가 보입니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크기가 도시 수분입니다. 오전에만 20여 km 정도를 걷다 보니 갈증과 허기가 느껴져 도시 초입의 대형 마트에 들러 초코바와 콜라를 한 캔 사서 먹으면서 걷습니다.
공사 중인 '에르미따 에스삐리뚜 산또 Ermita Espíritu Santo' 성당 옆에 문을 연 바르가 보이길래 점심을 먹기로 하고 10유로의 메누 델 디아를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습니다. 콜라와 몇 가지 먹을거리, 맥주안주로 딱인 음식을 먼저 같이 줍니다. 콜라 대신 맥주를 시킬걸 그랬나 봅니다. 샐러드와 돼지고기 스테이크로 만족스러운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까세레스의 구도심으로 길이 이어집니다. 굳이 언덕 위를 올라가게 만든 이유는 구도심의 성당 등을 둘러보고 가라는 뜻이겠지요. 구도심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답게 가꾼 꽃나무가 장식된 고택을 만납니다. 이어서 산호르헤 광장과 나란히 선 성당이 붙어 있는 큰 건물은 예수의 동반자 수도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 올드 타운의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카메라를 꺼내 연신 아름다운 건물들을 찍습니다. 이곳은 정말 중세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잠시 자료를 찾아보니 까세레스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 도시 중 하나로 손 뽑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왕좌의 게임'이라는 인기 드라마의 주요 촬영지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역시는 역시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혼자라도 충분히 좋지만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와서 하루 이틀 머물며 시간을 되돌리는 경험을 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당연히 대성당(까떼드랄)이 있습니다. 까떼드랄 관람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스치듯 지나친 것이 몹시 아쉽습니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다시 꼭 와봐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도심을 빠져나가며 왜 나는 굳이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대신 다음 마을로 가려는 걸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알베르게가 가장 크게 걸리는 듯합니다. 이곳엔 공립 알베르게가 없고 숙소의 비용이 높은 편이라 그렇게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렇게 아름다운 중세 도시일 줄 몰랐던 게 가장 큰 이유겠지요.
까세레스 타운을 빠져나가는 길은 에둘러 언덕(산이라고 하기엔 좀 낮은) 방향으로 길을 안내합니다. 오르다 보니 힘들고, 힘이 드니 마음이 간사해집니다. 저 밑의 쭉뻗은 도로 옆길로 가면 쉽게 갔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까사르 데 까세레스는 까세레스 근처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까세레스에서 약 10여 km 떨어졌는데, 그게 왜 까세레스 근처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마을의 중심부를 지났을 지음 공립알베르게와 관광안내소를 만납니다. 관광안내소에서 체크인하고 바로 앞의 알베르게로 들어가 짐을 풀고 씻고, 저녁을 위해 장을 보러 왔던 길로 1km쯤 걸어서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삽니다. 라면과 샐러드와 약간의 과일들로 저녁을 또 간단하지만 배부르게 해결합니다.
다음 구간도 짧지는 않아 아침 일찍 짐을 싸서 나옵니다. 알베르게와 관광안내소의 보라색 조명은 뭐랄까 좀 괴랄하다는 느낌입니다. 12일 차 코스에는 약 33km의 거리에 중간 마을도 서비스도 없는 것으로 확인했기에 힘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같이 출발했던 할머니 한분과 한동한 비슷하게 걷다가 동틀 무렵 어디선가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농장 사잇 길로만 20km가량 이동은 하는데, 사람은 볼 수 없고 양, 소, 말, 닭 그리고 싸가지 없이 사납게 짖어대는 개새끼들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뭔가 높은 지대 같지만 평지길이라 높이를 체감할 수 없습니다만 해발고도가 400m를 넘는 지역입니다. 로만로드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길이 매우 호젓하고 아름다워 걷는데 별로 지치진 않습니다.
중간에 만난 양들이 뭔가 성경 구절에 나오는 예수의 어린양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양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같이 출발했던 볼리비아에서 오신 할머니의 모습을 오늘 떨어진 이후 처음 뒷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초로의 나이에도 이 길이 그렇게 무리가 되지는 않아 보여 다행입니다.
알칸타라 저수지(Embalse de Alcántara)로 더 많이 불리는 'Embalse de José María Oriol 호세 마리아 오리올의 저수지' 곁을 지나 이곳으로 유입되는 타호,타구스 강을 건너갑니다. 두 번째 다리 끝 방향왼쪽에 보트 클럽이 있었는데, 영업을 하지 않아 까페 꼰 레체 한잔 먹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은 정말 중간마을도 서비스도 없어 어제 미리 사둔 간식과 음료가 없었다면 큰 고생을 할뻔했습니다.
저수지 않으로 탑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보이는데 로마시대에는 로마다리를 지키는 요새로 사용되었고 리꼰께스타(국토회복운동)으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후에는 템플 기사단이 이 지역의 요새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수지를 만든 이후로는 물속에 잠겨버려 여름철 뱃놀이와 수영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된다고 합니다.
두 번의 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서면 넓게 펼쳐진 초원이 막히는 곳 없이 다시 펼쳐집니다. 그리고 잠시 후 까냐베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길었지만 길 자체는 좋았던, 하지만 외로운 길 끝에 까냐베랄의 사설 알베르게(게스트 하우스)에 찾아들었습니다. 항상 그렇듯 씻고 빨래하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잠시 쉰 후 마을 구경을 합니다.
차가 제법 다니는 도로를 따라 산위쪽과 아래쪽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의 중심에 산타 마리나 성당이 있고 주변에는 바르들이 몇 개 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많아 바르에 들어가진 않고 성당 앞 벤치에 앉아서 저녁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를 찾아 간단한 먹거리를 산 알베르게로 돌아와 맥주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요 며칠 계속 35km 정도를 걷고 있는데도 몸이 피곤하지 않은가 봅니다. 계속 깊은 잠에 들지를 못합니다.
해뜨기 전 3명의 순례자 중 제일 먼저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섭니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큰 교차로 근처에서 산길로 접어드는데 이젠 깜깜한 산길도 무덤덤해지나 봅니다. 다운로드하여 놓은 유튜브 동영상을 틀어 소리만 들으며 걷는데 마을에서 많이 떨어져 홀로 서있는 흰색의 예배당은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지만 좀 으스스합니다. 무덤덤한지 몇 분 안 지났는데...^^;;
큰길에서 벗어나 한참을 숲 사이의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올라갑니다. 정상을 지나자 통이 터오는 동쪽 하늘을 마주합니다. 내리막을 한참 내려와 큰길을 다시 만나 건너니 나이트클럽 사인보드를 단 건물이 나옵니다. 식당과 숙소를 겸하는 듯한데, 장소가 참 생뚱맞습니다.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면 집에는 어떻게 가는 걸까요? 나이트클럽을 지나면 다시 외로운 초원길이 하염없이 이어집니다.
한동안 걸은 후 힘겹게 걷고 있는 순례자를 만납니다. 다리가 불안 불안해 보이는데 정말 배낭은 내 것의 두 배쯤 무거워 보입니다. 뭘 그리 챙길 게 많은지 궁급합니다. 중간에 그리말도라는 작은 마을을 경유할 수 있는데, 걸은 거리가 겨우 7~8km 정도밖에 안되어 요기나 휴식 필요치 않아 마을로 진입하지 않고 외곽 길로 계속 걷습니다.
멀리 마을이 보이는데 아마도 저곳이 '갈리스떼오 Galisteo'인 듯합니다. 보이긴 하지만 얼마나 먼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한참을 걸어도 계속 같은 거리처럼 느껴집니다. 더 멀어 보이는 느낌도 듭니다.
거의 다 와서 길을 잠시 헤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이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내 눈이 잘못된 걸까요? 성밑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보인 문연 바르에 들러 식사를 청합니다. '메누 델 디아'는 안되고 '쁠라도 꼼비나도'만 가능해 12유로의 가성비 떨어지는 식사를 합니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맛은 있습니다.
마을은 기본적으로 성안에 조성되어 있는데 방어를 위한 구조로 스페인의 올드 타운에서는 매우 흔한 형태라는 생각입니다. 성밖의 주택들은 전쟁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에 생긴 것이겠지요.
성곽 안으로는 빽빽하게 주택들이 들어차 있고 골목도 매우 복잡합니다. 중앙에는 광장도 있고 식당 등의 상업 시설도 있습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헤르떼 강 rio jerte'가 흐르고 있고 그 강을 가로지르는 놓여있다. '16세기 중세풍 다리'를 건너면 도로를 따라 걷게 되는데 차량이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좀 빨리 달려 위협감이 들기도 합니다. 갑자기 비가 간간히 뿌리기 시작하지만 귀찮아서 우비는 꺼내지 않고 카메라만 비닐봉지로 싸맵니다.
갈리스떼오에서 한 시간 좀 넘게 걸어 '알데우엘라 델 헤르떼 Aldehuela del Jerte'란 작은 마을에 이르러 벤치에서 잠시 쉽니다. 콜라 한 캔과 함께.
목적지인 까르까보소에 도착할 즈음 비가 다시 내립니다. 이 마을도 도로양옆으로 길게 형성된 동네인데,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에밀리오 형이 있습니다. 아 이거 반갑긴 한데 너무 시끄러워서... 오늘도 숙면은 어려워 보입니다. 'Albergue Señora Elena 엘레나 아씨의 알베르게'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주택의 2층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13유로의 가격을 생각하면 뭐 그다지 머물고 싶지는 않은 곳이었습니다.
동네 바르엔 아저씨들이 많아서 들어가기 꺼려져 오늘 저녁도 마트에서 사 온 것들로 간단하지만 배부르게 먹고 하루를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