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2편
은의 길을 걷다 보면 다른 순례길(프랑스길, 북쪽길, 쁘리미티보길, 영국길 등)에서는 잘 볼 수 없던 돌기둥을 꽤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돌기둥들의 명칭은 Miliarios Romanos(밀리아리오스 로마노스)라고 합니다.
이 밀리아리오들은 로마 제국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던 로마 이정표로 단순한 거리 표시를 넘어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 제국의 말처럼 방대한 도로망을 구축하며 1 로마 마일(Milia Passuum, 약 1,480 미터)마다 세운 원통형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밀리아리오입니다. 높이는 보통 2~4미터에 달하며, 화강암 등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무게가 2톤이 넘기도 합니다.
스페인은 과거 로마의 핵심 속주였던 '히스파니아' 였던 만큼, 유럽 내에서도 밀리아리오가 가장 많이 만들어졌으며 잘 보존된 국가라고 합니다.
밀리아리오는 단순히 '다음 도시까지 몇 마일 남았다'를 알려주는 표시간 그 이상이었습니다. 밀리아리오의 표면에는 도로를 건설하거나 보수하도록 지시한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제국 변방의 백성들에게 로마 황제의 권위와 은혜를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훌륭한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 훌륭한 길을 위대한 황제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밀리아리오는 로마가 군대의 신속한 이동, 세금 징수, 그리고 광물(특히 스페인의 금과 은) 수송을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국가 인프라를 관리했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라고 합니다. 더불어 돌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은 현대 역사학자들이 해독을 통해 건설 연대, 고대 도시의 정확한 라틴어 지명, 그리고 당시의 행정구역 등을 정확히 추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습니다.
스페인에 남아 있는 주요 로마 도로는 비아 데 라 쁠라따(은의 길), 비아 아우구스타(까디스~피레네 산맥), 비아 노바(포르투갈의 브라가- 스페인 아스또르가) 등이 있습니다.
스페인에 산재하던 이 밀리아리오들은 수천 개 이상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야외의 로만 로드 경로상에 남아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박물관에서 보호 및 보관,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의 길에서 이 밀리아리오들을 보고 만져보는 경험은 길고 외로운 여행에서 기억의 주요 조각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로마 시대 당시의 원형 그대로의 야외 밀리아리오는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그 형태를 본떠 만든 순례길 이정표는 은의 길 중 아스또르가 방향이 아닌 오우렌세를 지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이어지는 구간을 사나브레스 길이라고 하는데, 이 길의 지역에서는 가끔 밀리아리오 형태의 이정표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밀리아리오는 보호를 위해 메리다, 뽄떼베드라의 박물관 등에서 전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