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가 끔찍해졌다

by 감동글

어릴 적 내 아버지는 늘 그리운 존재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헤어짐으로 동생과 함께 하루아침에 울산에서 부산 친할머니집으로 오게 되었지만 주말마다 먼 길 달려 우리를 보러 오던 아버지가 맨날 잠만 자고 가셔도 같은 방에 세 명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좋았다


한 주가 흘러 다시 찾아온 주말에는 집에 왔다가 금세 볼일 있다며 옷만 갈아입고 나가셔도 그 짧은 순간 아버지의 스킨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았고


그다음 주는 일이 있어 못 오고 또 그다음 주도 바빠서 못 온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상처가 되긴 했지만 늘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 그리고 다시 보게 되면 반가울 마음을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간직할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내 아버지는 항상 그립고 보고 싶던 존재였는데 막상 할머니집에서 다 같이 살게 되었을 때 정작 우리 사이는 멀어져 갔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떠들어 대던 그 시절,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IMF는 우리 집도 피해 갈 수 없었고 안 그래도 가난한 집안을 시궁창 밑까지 밀어 넣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는 한동안 방황하셨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비슷한 경험이 있어 이제는 조금 이해하지만 새끼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만으로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터,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술을 드시는 날이 많아졌으며 간혹 화풀이 상대가 내가 되어야 할 때면 모든 걸 등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사춘기가 오고 키가 아버지보다 더 커졌을 때 처음으로 반항을 해봤다


아버지와 형이 멱살을 잡고 있던 장면을 보여준 동생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지만 아버지가 엄한 걸 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너무 싫었다


아버지가 끔찍해졌다


다툼이 있은 이후부턴 내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얼마 뒤 집을 나가 버렸다


처음엔 좋았다


벌컥 방문을 열어 불 같이 화를 내는 모습에 가슴 졸일 일도, 핀잔 들어 마음 상할 일도 없었으며 용돈을 달라고 쭈뼛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고등학교 졸업장 달랑 하나로 일 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보증금 단 돈 백만 원 마련할 수가 없어 여관 달방 생활을 오래 했지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늦게 들어오고 싶음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어 좋았다


20살 어린 청년이 마주한 사회는 거대하고 단단한 빙벽 같았지만 적어도 아버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이 하나만으로도 힘든 시간 버틸 수 있었다


끈기보단 오기로 지내온 20대가 중반을 들어서고 혼란했던 시기도 지나니 아버지와 나 사이 때문에 피해를 본 죄 없는 할머니와 동생은 보고 싶어 지더라


몇 년 만에 집에 찾아가 마주한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어디서 살았는지 뭐 먹고 지냈는지 궁금해하지 않으셨지만 마주한 표정에선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이후 각자 지방에서 생활하느라 크게 만날 일은 없었고 가끔 가족행사 때 만나 의견대립이 있을 때면 여전히 큰소리부터 나와 한 번씩 놀라게 했지만 이젠 나도 그 정도 감정은 다스릴 줄 아는 나이가 되어 금방 잊어버렸다


시간이 더 흘러 교제하던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갔다


무뚝뚝한 우리 형제와 달리 애살 맞은 여자친구가 당신 마음에 드는지 항상 먼저 안부 연락을 하셨고 아버지와 나 사이를 잘 아는 여자친구도 불편한 기색 없이 잘 받아주었다


그 여자친구와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와 고부 관계가 되었어도 둘은 나와 반대로 사이좋게 지냈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항상 우리 집으로 보내줬고 우리 사는 곳 주변에 사고 소식이 뉴스 나오면 항상 새벽같이 전화가 왔으며 계절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건강에 대한 걱정을 하셨다


생일이나 명절 같은 특별한 날이면 입이 떡 벌어질 액수의 용돈 주는 모습에 간혹 너털웃음이 나긴 했지만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도 내가 그리운 존재였다는 것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남겨진 딸을 위한 장모님의 조금은 특별한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