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게임의 교육적 활용이 가능하려면
진화에 관해서 사람들이 가진 대표적인 오해는 '강한 놈만이 살아남아서 진화했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대표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선생님에 따르면(<진화론의 오해와 진실 / 최재천의 아마존, 전지적 관찰자 시점>, 2023. 03. 30, 유튜브) 찰스 다윈의 이론은 따듯한 이론이라고 소개한다.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야, 웬만큼만 잘하면 너도 살 수 있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풍요로운 시대에는 종의 도태가 일어나지 않기도 하고, 굉장히 어려워지더라도 낙마하지만 않으면 살아남는 것이 '자연선택론'인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다윈의 자연선택론 의미를 왜곡해서 '세상은 약육강식'이라는 관점을 퍼뜨리려는 사람들의 선동이 먹힌 것이다. 실제로 누구나 살다 보면 삶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잘못된 오해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사실과 다르지만 한 번 믿게 되고 '세계관'이 형성되면, 그 생각은 바꾸기 어렵다. 약육강식을 내면화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를 나아가서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 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선택론을 왜곡해서 퍼뜨린 약육강식 논리는 우리의 사회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 양육강식 논리는 '돈이면 다 된다'는 것을 전파하고 있다. "받아들이긴 싫지만 맞는 얘기 아니야?" 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다. 생태계 유지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공존에서 시작한다.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여 쓸모 있는 것만 취하는 것은 생태계의 연결을 끊어내는 것과 같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 세계는 달라졌다. 경제계에서 조차 RE:100이 강조되고 ESG경영 얘기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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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대중문화는 함께 자란다. 피아노교습소가 골목마다 생겨나지 않았으면 피아노 음악은 아직도 클래식의 골방에 갇혀 호사가들의 후원을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권력과 재력, 인기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점점 그 순환이 빨라지는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어왔다. 권력도 돈도 유행도 돌고 도는 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근대화는 표준화를 통해 유동성을 높인다. 유동성이 높아지면 균일화가 진척되고 그 결과 유동성이 떨어져 사회가 정체될 조짐이 보이면 또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여 에너지 낙차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신상품으로, 대중문화는 새로운 장르로, 민주주의는 새로운 권력으로 끊임없이 에너지 낙차를 만들어냄으로써 유동성을 다시 높인다. 현대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돌고 도는 원리다.
유동성이 높아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근대화의 피치 못할 결과이므로 거부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고립된 삶을 자초하는 길이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이 대다수 인간들에게 더 힘든 삶을 안겨주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너지 낙차가 없는 평등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사회가 정체되면 퇴행하기 마련이다. 아미시 공동체처럼 근친상간이 예사로운 일이 된다. 근대화라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상 부작용을 줄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소수의 엘리트가 과학기술 영역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을 선도하고 있지만, 그들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다. 눈에 띄는 엘리트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언뜻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쓸모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쓸모 있는 것만 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놓치게 된다.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습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효율성을 추구한다며 당장 필요한 것만 습득하려는 자세는 정작 원하는 그것도 놓치게 만든다. 연결지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수학의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제곱근 개념은 무리수, 함수, 집합 개념으로 이어진다. 시험에 대비해 문제만 죽어라 푸는 학생보다 전체의 맥락 속에서 여러 개념들을 연결 지으며 생각할 줄 아는 학생이 진짜 수학을 잘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가르쳐주었듯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의 쓸모는 연결의 맥락에 따라 있음과 없음이 바뀐다. 죽을 뻔한 맹상군을 살린 것은 도둑과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공부를 잘한다고 뽐낼 일도, 못한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다. 교육은 모든 아이들이 자존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일이다.
<쓸모없음의 가치>, 현병호(격월간 민들레 발행인)
"존재의 쓸모는 연결의 맥락에 따라 있음과 없음이 바뀐다."
게임 얘기로 돌아오자.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게임을 어떻게 연결해 왔는지를 보면 게임이 쓸모가 있었는지, 어떤 쓸모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게임은 오랫동안 다른 문화 콘텐츠 또는 취미활동보다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게임하면 폭력성, 선정성, 사행성, 사회성 발달 저하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들과 주로 연결됐다. 게임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취미가 영화감상이면 고상하게 느껴지지만 취미가 게임이면 현실 생활은 잘하지 못할 것 같은 외골수처럼 여겨지는 게 있었다.
2010년대 전후로 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바일 게임 열풍에 힘입어 게이머들이 늘어나고 게임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게임의 연결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하나의 취미로 받아들여지게 됐지만 게임 자체의 특징 또는 장점에 주목한 것 같지는 않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급성장하는 산업이기에 주로 경제적인 면과의 연결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게임의 문화적, 예술적, 기능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비평, 연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임 산업의 규모가 지난 15년 동안 5조에서 20조로 엄청난 성장을 한 것에 비하면 게임을 사회문화와 연결하는 시도는 여전히 많지 않다.
"쓸모 있는 것만 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놓치게 된다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상업적인 면만 취하려 하고 문화·예술·기능적 가치와 연결하지 못한다면 콘텐츠의 균형 있는 질적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돈벌이가 되는 자극적인 콘텐츠만 살아남게 된다면, 잠시 수그러들었던 게임의 폭력성, 선정성, 사행성, 사회성 발달 저하에 대한 우려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이미 모바일 게임의 사행성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 :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문화여야 게임의 장점도 재조명할 수 있다 (장기적 관점)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리고 10년 동안 청소년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통찰이다. 고민해서 잘 선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좋은 선택'이 되도록 애쓰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배울지 말지', '이 도전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수많은 학생을 지켜봤다. 1년이 지난 후 한 해의 배움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선택이었냐'가 아니라 '선택 이후에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였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한다면 문제해결력과 끈기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취가 쌓여서 더 큰 배움과 도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2016년부터 나는 서울시교육청 '오디세이학교' 협력기관의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디세이학교'는 교육 선진국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를 벤치마킹하여 만든 교육과정이다. 2017년 1월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라오스를 여행하던 중, 덴마크 청년 두 명과 1박 2일 오지탐험 프로그램을 함께 하게 됐다. 신기하게도 둘 다 에프터스콜레 출신이었다. (덴마크에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에프터스콜레가 있다. 덴마크 학생들의 30% 내외가 선택한다.) 1박 2일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덴마크 청소년·청년들은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게 향후 진로와 관련이 없어도 "쓸모없다"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게 인상 깊었다. 두 사람은 핸드볼 집중과정을 운영하는 에프터스콜레 출신이었다. 프로 핸드볼 선수가 될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운동이 좋고 핸드볼이 좋아서 갔다는 것이다. 한국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진로와 관련되지도 않은 '쓸모없는 일'로 1년을 낭비한 것이다. 많은 덴마크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갭이어(Gap year)를 갖는다. 자기들은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아서 6개월~1년 세계 여행을 다니는 경우인데, 이런 학생들도 꽤 많다고 한다. 대학을 갈지, 직업을 가질지, 조금 더 탐색의 시간을 가질지 여행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고민해 본다고 했다. 한국사람 관점에서도 세계여행 얘기는 그래도 납득이 된다. 정말 좋은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내 주변에서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세계여행이 쓸모없는 일은 결코 아니겠지만 어서 빨리 관련 스펙을 쌓아서 진로를 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크기 때문이다.
2018년 1월에 국제교류 프로그램 인솔교사로 덴마크에 가게 됐다. 인상적인 게 많았지만 스포츠 에프터스콜레를 견학하고 온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스포츠 선수를 양성하는 학교는 아니지만, 스포츠 경험에 진심이다. 시설이 너무 잘 갖춰져 있다. 잔디구장, 실내체육관 여러 개, 수영장 등 규모가 거의 우리나라의 종합운동장급이다.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이 같이 쓰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모두에게 윈윈이다. 혹시나 했는데 Esports도 있었다. 공간도 끝내준다. 컴퓨터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훈련하는 도구로 Esports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Esports의 교육적 효과를 홍보하고 있다. 협동, 소통, 헌신, 자신의 경기와 팀의 성과에 대한 책임감, 훈련을 견디는 힘, 집중력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Esports 종목은 Counter-Strike: Global Offensive. 다른 게임은 하지 않는다.)
"저건 덴마크니깐 가능한 얘기다" 하실 것이다. 그렇다. 덴마크와 우리나라는 인구, 문화, 주요 산업 등 완전히 다르다. 단지 제도만 가져온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한국형 에프터스콜레'라고 할 수 있는 오디세이학교를 이미 9년째 운영 중이지만 학생들의 수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오디세이학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서울시의 고1 학생 약 7만명 중 100명밖에 안되는 0.14%비율이지만, 입시 목적이 아닌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열려 있어야 한다. 덴마크처럼 학생들의 20~30%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은 아니더라도 3.5%의 염분이 바다를 썩지 않게 하듯이 적어도 3~4%의 학생은 다른 배움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덴마크 사례에서 배워야 하는 핵심은 청소년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하고자 한다면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미리 판단하는 게 아니라, 쓸모가 있을 수 있도록 연결을 도와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넓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창의성의 중요하다고 누구나 얘기한다. 창의성은 자유로운 상상에서 시작한다.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상상을 가로막는 가장 쉬운 방법은 쓸모 있냐 없냐를 따지는 것이다. 적어도 교육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없어질 때 비로소 창의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기반이 갖춰진다면 가장 먼저 재해석되어야 할 것은 '게임'이다. 오해와 편견 없이 보면 교육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충분히 좋은 게임은 이미 많이 있다. 덴마크 학생들이 학교에서 Counter-Strike를 하는 것처럼, 언젠간 한국의 학교에서도 몰래 또는 숨어서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게임룸에서 게임을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론 :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청소년기에는 관계 욕구가 엄청 커진다. 학교에서 배우는 게 하나도 없어도 친한 친구 1명만 있으면 학교 가는 게 즐거울 수 있고, 학교를 아무리 좋아해도 같이 다닐 사람이 없으면 지옥으로 느끼는 게 청소년이다. 친구와 같이 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주로 롤)이나 모바일 게임이 대세가 된다. 오프라인에서 관계가 어려운 경우, 온라인 친구를 만들어 같이 게임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게임이어도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억지로 뭘 할 수는 없는 시기다.
그래도 청소년과 소통이 가능하다면 보드게임을 할 수 있게 하면 좋다. 특히 모바일게임이나 온라인게임에 빠져 있는 청소년이라면 게임하는 것을 무조건 막기보다는 학교(방과후학교, 동아리)와 청소년수련시설(문화의 집, 수련관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보드게임 교실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추천한다. 친구가 없으면 가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즐겁게 교류하는 활동이기에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친해지기 쉽다. 보드게임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언어, 비언어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 목표를 위해 전략과 전술을 고민해야 하는 지성 또한 필요하다. 그렇기에 특별히 비교육적인 소재(지나친 경쟁, 편견이나 다양성을 해치는 가치관 주입)가 아니라면 보드게임은 그 자체로 교육적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육용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역사 같이 특정 과목은 가능할 수 있지만, 어떤 교과지식을 학습하기 위해 디자인된 게임은 재밌기가 어렵다. 무리하게 교육용 게임을 하게 하면 오히려 보드게임이 싫어지게 만들 수 있다. 상업용 게임들 중에서 충분히 교육적인 게임들을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호자들이 청소년과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것도 추천한다. 물론 안 하다가 갑자기 시작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가급적 소통이 잘 될 때(초등학생) 시작하는 게 좋다. 월 1회 정도라도 보드게임을 하는 날으로 정례화해두면 좋다. 혹시 보드게임하면 윷놀이, 화투, 포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보드게임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적절히 새로운 게임을 하면 질릴 염려도 없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자녀와 함께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면 청소년에게 유튜브나 모바일·온라인 게임이 아닌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재미의 가능성을 아는 것과 모르는 차이는 크다. 게다가 보드게임의 창의적이고 기발한 메커니즘(게임 시스템)은 창의력 증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보드게임의 교육적 효과는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교육적인 보드게임도 추천할 예정이다
마치며...
게임이 문화로서, 예술로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에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많았다. 게임의 교육적인 활용에 대해 찾아보면 거의 다 게이미피케이션 관점이다. 현재 게임에 대한 인식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반대로 생각하면 게임은 기존의 틀로 해석할 수 없기에 더 특별하다. 게임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시도가 늘어난다면 더 많은 가치를 발견하고 더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참고자료
투머로우 전문작가. "[스페셜 리포트] 게임, 현대인의 문화가 되다". <삼성전자 블로그>. 2015.07.22.
이경혁. "게임비평의 좌표계, 그리고 미래의 비평". <게임문화포럼 브런치>.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