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저장 공간이 부족합니다."
드리이브 용량도, 스마트폰 저장 공간도, 곳곳 나의 공간이 가득 차있다.
아무리 지워도 잠시 뿐, 티가나지 않는다.
쌓아온 것들이 너무 많다.
무엇을 그리 저장하고 살았을까.
혹시 몰라서, 아쉬워서,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저마다의 이유로 남겨둔 파일들을 이제 정리조차 벅찬 무게가 되어있었다.
문득, 내 삶의 지난 몇 년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늘 빠르게 지나가는데,
정작 나는 과거의 조각들만 끌어안고 있었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건 파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잃어버리는 것보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 없는 파일도, 끝난 관계도,
지나간 감정도 그대로 저장해 둔 채 살아간다.
하지만 저장된 것이 많아질수록
정작 중요한 것을 담아둘 공간은 줄어든다.
삶도 마찬가지다.
사진첩 속에는 이미 지나가버린 추억이 가득하고
메모장에는 언젠가 하려던 계획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 많은 것을 끌어안고도 나는 여전히
"할 게 너무나 많고, 정리가 안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세상에 밀려난 것은 "정리"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저장'만 하며 살아왔다.
감정도, 관계도, 해야 할 일도,
그렇게 많은 것들을 담아두고도 정작 나 자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오래된 파일들을 삭제했다.
흐릿한 사진, 다시 보지 않을 문서, 의미를 잃은 메모들까지.
지우는 순간은 후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저장공간은 가득 차버렸다.
그제야 알았다.
문제는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계속 채우는 습관에 있었다는 것을.
유난히 마음이 복잡하던 어느 날,
나는 지우기 전 나에게 질문했다.
"이게 정말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가?"
10년 전, 왜 찍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사진을 지웠다.
그저 빈 공간이 하나 생겼을 뿐인데
내 안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여유의 시작이고,
삭제는 상실이 아니라 회복의 준비라는 것을.
기계처럼 나에게도 용량이 정해져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도,
붙잡아둘 수 있는 기억의 무게도 한정되어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비로소 다시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 나는 마음속에서도 하나를 지워보기로 했다.
후회로 남아있던 말 한마디,
억지로 쥐고 있던 기대 하나,
자꾸만 나를 붙잡던 미련 한 조각,
어떤 것이든 하나만 비워도 삶이 조금은 가뿐해질 것 같았다.
비움은 잃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가벼워야 움직일 수 있고, 비워야 새것이 들어오며,
텅 빈자리에서 비로소 나 다운 삶이 시작된다.
여전히 비움에 서툴지만, 하나라도 지워보기로 한다.
그만큼의 공간을 조용히 나에게로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