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나의 그릇을 비워
당신을 담는 일이다.

이해

by 감격

엇갈린 밤의 풍경

이해(理解)라는 단어를 가만히 뜯어본다.
‘이치(理)를 풀어낸다(解)’는 뜻이니,

결국 상대의 결을 따라 천천히 풀어보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결을 보기도 전에 내 마음의 모양대로 상대를 재단해 버릴까.
내가 불편한 만큼 단정하고, 내가 불안한 만큼 왜곡하고, 내가 서두르는 만큼 생략한다.


과거에 나는 아침이면 마주하는,

지난 밤 남편이 남겨 둔 설거지거리가 꽤 오랫동안 '외면'의 상징이었다.

아이들이 잠들기도 전에 TV 불빛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그의 모습.

건강 수치가 나빠지는데도 야식을 고집하는 그가 많이 미웠다.


나는 수슬로 체력도, 에너지도 바닥난 상태였는데,

가장 가까운 이는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처럼 혼자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내 고통을 외면하는 것 같아 서러움은 남몰래 켜켜이 쌓여갔다.


미움에서 연민으로

그렇게 2~3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남편과 무심히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전과 다른 깨달음 하나가 가슴을 쳤다.


'저 사람은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웠을까.'

아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집안은 늘 긴장감이 감돌았고,

그는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것이다.

아픈 나를 건드릴까 봐, 혹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절망하며

그는 스스로를 거실 한구석에 유배 보낸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술잔은 즐거움의 산물이 아니라,

말 붙일 곳 없는 집 안에서 홀로 견뎌내야 했던 고독의 무게였다.

내가 아플 때 그가 택했던 '모른 척'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서툰 방어기제였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


내 기준이라는 좁은 감옥

돌이켜보면 그는 늘 나를 최우선에 두던 사람이었다.

다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문법이 나와 달랐고, 센스가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나는 내 방식의 사랑만이 정답이라 믿으며,

그를 내 기준이라는 좁은 감옥에 가두려 했던건 아닐까.


우유 하나, 세제 하나를 사 오면서도

내 눈치를 보며 망설였을 그의 머뭇거림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다.


관심사도 다르고 삶의 기준도 달랐던 두 사람이 만나 '우리'가 된다는 건,

상대를 나에게 맞추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이어야 했다.

내가 생각한 이해는 '나를 완벽히 알아주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이해를 빙자한 '지배'였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내 그릇의 크기만큼 보인다

이해와 오해는 결국 내 마음의 그릇 크기에 달려 있다.

나만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서운함의 씨앗이 되지만,

'나'를 내려놓고 '그'의 자리에 서보는 순간

미움은 연민으로, 원망은 고마움으로 얼굴을 바꾼다.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의 진심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며,

동시에 그 과정이 내 마음에도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듬어야 한다.


이해는 상대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 확장되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나의 그릇을 비워 당신의 서툼을 넉넉히 담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뒤늦게 배운 사랑의 또다른 가장 깊고도 따뜻한 언어다.



[이 편이 남기는 정리]

이해는 상대를 내 기준에 완벽히 끼워 맞추는 정답 찾기가 아니라,

나의 완고한 잣대를 거두어 상대가 가진 ‘서툰 진심’이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비움의 과정이다.


[이 편이 남기는 질문]

오늘 당신을 서운하게 했던 누군가의 그 행동은 정말로 당신을 향한 무심함이었을까요,

아니면 당신의 기준에 가려져 차마 보지 못했던 그만의 최선이었을까요?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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