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어릴 적 내게 '혼자'라는 상태는 정받이 없는 문제지 같았다.
그 빈칸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불안함,
누군가 곁에 있어야만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 같았고,
타인의 온기가 없는 공간은 차가운 냉기가 도는 폐허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 지를 먼저 고민하던 삶의 연속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고독을 잠시 누린 적이 있었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산에 오르던 시간.
뷰파인더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며 셔터를 누를 때,
나의 호흡과 자연의 숨소리로 평온해지는 시기가 있었지만,
찰나에 불과했기에 잠시 즐기는 취미였을 뿐,
삶을 지키는 철학이 되어주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고독을 갈구하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혼자 있을 수 없는 육아의 한복판에서였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역할로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며 보내는 24시간.
몸은 늘 누군가와 맞닿아있고 귀에는 아이들의 웃음과 울음이 가득했지만
내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다.
나를 위한 시간이 단절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혼자 있는 시간'이 사실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생존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타인의 요구에 주파수를 맞추느라 정작 내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호를 무시해 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재앙인 줄 알았던 번아웃이 나에게 되려 살아내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고독의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넘어서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의 소음을 끄는 과정이었다.
그중에 하나가 명상이었다.
명상을 통해 나는 내 안의 불안과 대면했다.
호흡은 얕았고 아무리 해도 숨 쉬는 게 편하지 않았다.
지도에 따라 욕심내지 않고 생각날 때면 심호흡부터 가다듬고 있다.
그렇게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묻는 것부터
어색하고 답답하지만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채워나갔다.
나를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지금 써 내려가고 있는 글들 역시 그 밀도를 높이는 과정의 연장선이다.
혼란스러운 내 안의 문장을 정돈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나에게 고독은 피하고 싶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정성스럽게 채워 넣어야 할 '충만한 밀도'가 되고 있다.
고독을 견디지 못하던 어린 날의 나와,
고독을 통해 나를 세워가는 지금의 나 사이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눈물이 고여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를 이해하려 애쓰는 시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내 삶의 중심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혼자다.
그 사실을 외면하려 할수록 외로움은 커지지만,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독의 공간을 가꿔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도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다.
내가 나를 온전히 안아줄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안아줄 여유도 생기는 법이니까.
오늘도 나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책상 앞에 앉는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가장 나다운 목소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다시금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준다.
[이 편이 남기는 정리]
독은 관계의 결핍이 아니라 자기 관계의 시작입니다.
타인에게 의존하던 존재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입니다.
명상과 글쓰기를 통해 고독의 밀도를 높이는 것은,
삶의 풍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좌표'를 설정하는 일입니다.
[이 편이 남기는 질문]
당신은 오늘 하루, 단 10분이라도 온전히 자신과 마주하는 '밀도 높은 시간'을 가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