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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Jul 04. 2022

이성애자로 오해하기 금지

정한새




내가 최근에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어떤 이성애자는 비이성애자로 ‘오해’받은 경험을 강렬하게 기억한다는 거다. 왜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았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펄쩍 뛰거나 기분 나빠하거나 아무튼 난리부르스도 그런 난리가 없다. 퀴어가 거의 평생을 비퀴어로 여겨지며 살아가는데도 별말 없이 지내는 것과 비교하면 엄살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몇 주 전에는 직장 선임과 밥 먹는 자리가 있었다. 식사 자리니만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결혼 얘기가 나왔다(이 소재가 얼마나 지겹고 진절머리 나는지는 언젠가 이야기할 자리가 오리라). 나는 그 날도 n년 째 하는 ‘결혼 생각 없다, 나도 없고 애인도 없다, 애인이 하자고 해도 내가 안 할 거다, 사랑과 상관없다’라는 이야기를 거의 자판기처럼 해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 물었다.


“한새 씨는 애인이라고 해?”


솔직히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럼 애인을 애인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요...? 애칭이 있냐는 뜻이에요?”

“아니, 나는 애인이라고 안 하지. 오빠라고 하거든.”


...어쩌라는 걸까. 아니, 정말로요.




원론적인 얘기부터 하자. 나는 누가 자신의 애인을 뭐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 없다. 내 앞에서 애인을 지칭할 때 길동이라고 하든, 언니라고 하든, 애라고 하든, 오빠라고 하든, 띠뿌쨔파라고 하든 솔직히 내 알 바는 아니지 않나. 애칭을 부르든, 대중적인 호칭을 끌어오든, 둘이 있을 때는 아모레 미오지만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뀨깃이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 없고 내가 그 호칭을 좋아하든 말든 그 사람이 신경 쓸 바도 아닌데다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중요한 건 어쨌든 그 사람이 자기 애인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걸 내가 안다는 거다. 그게 언어의 사회성 중 하나잖아요? ‘이제부터 내가 빨갱이라고 하면 그건 내 애인을 말하는 거야’라는 합의 정도만 주고 받으면 된다.

둘째. 내 애인이 늘 ‘남성’일 리가 없다. 나는 바이섹슈얼이고, 남성과의 연애 횟수가 여성과의 연애 횟수와 비슷해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지금 애인은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일 테지만, 그 전에 썸 타던 사람은 퀘스쳐너리 여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애 경험을 말할 때 성별 중심적인 지시어를 쓰면 사실상 커밍아웃이나 다름없었다. 퀴어 커뮤니티도 아니고, 지방 소도시에서 살면 그런 사태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진다. 더하여 무척 오랜 기간 내 애인은 전부 ‘여친’이어서 ‘남친’이라는 단어가 너무 이상했다. 그러면 (법적 성별) 남성인 친구랑은 어떻게 구분하란 소리야? 게다가 ‘여친’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너 레즈냐’고 하겠지요? 그것마저도 아닙니다만.     

한 번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내 연애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고, 남의 연애 얘기도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친구나 가족에게 좋았던 일을 쑥스러워하며 이야기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상담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마저도 되도록 최소한으로 하려고 한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쩌고 저쩌고 조건을 달아도 연애 얘기를 하는 건 늘 어렵다. 왜냐하면 내 연애는 나의 연애이기도 하지만, 애인의 연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계가 모호하다는 건 인정한다. 이를테면 ‘이건 비퀴어들 앞에서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는 경우가 있고, ‘이건 퀴어들 앞에서는 하기 어렵겠군’ 할 때도 있고, ‘이건 아무에게도 하고 싶지 않다’도 있다. 특히 내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연애 얘기를 하기가 부담스럽다. 내가 말한 이야기, 내가 발화한 단어로 애인이나 내 연애 관계에 대해 순간순간 판단하는 것도 싫고, 이성애자들이 ‘남자는 원래 그래’라거나 ‘네가 여잔데 좀 사근사근하게 굴어’ 같은 말을 듣는 것도 싫다. 통상적인 이성애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 안에 나와 애인을 넣고 해석하는 걸 듣다 보면 너무 답답하다. 이성애자들이 내 연애 얘기를 듣고 내린 결론은 대체로 ‘너는 하는 거 보면 지금 애인 아니면 만나줄 사람 없겠다’이다. 저도 근본적으로 거기에 동의합니다만, 모든 발화의 전제에 나와 애인의 연애를 ‘이성애 관계’로 깔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느껴진다. 결론이 똑같아도 과정은 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나와 애인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 그야 전부 틀린 말은 아니죠. 나는 시스젠더 여성이고 애인은 시스젠더 남성이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이성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두 사람이 비퀴어라는 얘기는 아니잖은가. 그러니까 ‘왜 애인을 애인이라고 부르냐’는 질문은 (최소한 지금의 한국에선) 사실상 인간의 기본값을 이성애자로 놓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퀴어 커뮤니티나 다양성을 인지한 모임에서 활동할 때는 누구도 서로에게 이런 류의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 이성애자가 자신이 퀴어로 ‘오인’받았던 경험을 발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권력이 아닐까 싶다. 그 경험이 일상이 아니라 ‘특별’하기 때문에 말을 꺼내고 좋든 싫든 감상을 남기는 걸 보면 지겹고 의아하다. 왜 당신을 퀴어일 거라 생각했냐고? 그야 당신이 나를 비퀴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후자에 이유가 없다면 전자에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헤더 출처 : Ekaterina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996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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