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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Jun 27. 2022

여기 사람이 산다.

조재

내가 사는 지방을 진심으로 애정 하게 되는 날이 올까. 나는 자주 그런 질문을 던졌다.


수도권(혹은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지방에 사는 이에겐 수도권에 ‘편입’될 몇 안 되는 기회가 주어진다. 첫 번째는 대학 진학. 말 그대로 인(in) 서울 대학에 가기를 희망하고 그 목표로 달려 나가는 걸 학생의 본분이요, 미덕으로 여긴다. (물론 영동 학생의 경우 영서에 있는 지방 국립 거점대학인 강원대학교에 진학하기를 강요받는 경우도 많다. 특히 딸들이 그러한데, 이건 다른 맥락이므로 여기선 다루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최소한 강원대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여기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고려되지 않는다.


전국의 학생이 서울권 대학에 갈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런 것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래서 서울권 대학에 갔느냐는 결과뿐이다. 덕분에 어떤 사람은 패배감을 안고 대학 시절을 보낼지도 모른다. 취업만은 꼭 서울에 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그렇다. 두 번째 기회는 취업이다. 많은 사람이 대학 진학할 때 그랬듯이 서울에 원서를 넣는다. 물론 일단 지방에는 일자리가 없다. 일자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서울로 향하기도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야' 하므로 서울로 향하기도 한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사람에게 자신이 나고 자란 지방은 어떤 곳으로 기억될까.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 20대 초반을 보낸 추억이 서린 곳이자 마땅히 벗어나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애증’의 대상으로 남지 않을까. 이런 상태에서 내가 사는 지방을 다방면에서 이해하고 진심으로 애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강원도를 모른다. 아니 안다고 착각하며 살았지만, 최근에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어떤 고민과 화두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어떤 생을 보냈는지 나는 정말 몰랐다. 그걸 알게 된 건 근 1년간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 하러 다닌 덕이다. 100명이 훌쩍 넘는 강원도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여기 사람이 산다’는 말의 의미를 체감하게 됐다. 관광지와 수자원 정도로 이해했던 댐 덕분에 수몰민이 되어버린 사람들,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강원도의 노인 문제 해결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기로 결심한 시니어들, 지역에서 나고 자란 작물을 지역에서 소비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 강원도에서 직접 내 일터를 꾸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스타트업 창업자들. 그들을 만나며 지명으로만 알던 강원도 구석구석이 지도에서 벌떡 일어나 서사로 다가왔다.


그건 참,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신비한 경험이었다. 서사로 다가온 강원도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강원도와 달랐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진심 어린 애정'이 생겼다고 하기엔 뭐하지만 적어도 이곳을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게 되었다.


수도권과 지방의 이분법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서사가 여기 존재한다. 강원도는 마땅히 떠나야 하는 곳,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남겨진 곳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말 여기 사람이 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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