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이진 작가의 '카페, 공장'이라는 책을 읽었다. 해냄출판사에서 같은 작가의 신간인 '언노운'이라는 책을 페페에 보내주었는데 주인공 중 한 명이 트랜스젠더로 등장한다. 헤테로로 추정되는 작가가 이런 글을 쓴 게 무척 흥미로웠다. 이전에 어떤 작품을 썼는지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급하게 몇 권을 빌렸고, 그 안에 '카페, 공장'이 있었다.
아케이드 류의 게임이 연상되는 책 표지가 귀여웠다. 책날개에 쓰인 작가 이력 중에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도 있어서 이유 모르게 어쩐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표지에 그려진 대로 네 명의 십대 학생이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정, 민서, 영진, 나혜는 지방의 면 단위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생이다. 네 친구는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힙하다는 어떤 카페를 방문하게 된다. 창고처럼 생긴 카페는 '전깃줄과 파이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쓸어보면 손바닥이 까질 듯 거칠거칠한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명은 음료 값이 비싸지만 오래 있기에는 다소 불편한 카페의 의자에 앉아서 이건 '우리 집에도 있'다, 저건 '우리 할머니 방에 있는 거랑 똑같'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들뜬 네 명의 카페 방문 끝에 남는 건 허망함이다. 서울에서 사는 사람은 절대로 모를, 오로지 이 카페에 오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준비해서 두 시간 넘게 오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일종의 박탈감. 그리하여 네 명은 '동네 빈 공장'에 자기들만의 카페를 만들기로 한다.
넷이 만든 카페에서 음료와 디저트를 만들고, 손님을 맞이하고 장사를 해가면서 어른의 세계에 편입하는 이야기는 좁은 동네만 알던 네 친구의 성장기이자 동시에 어른으로서의 준비를 위한 성장통이기도 하다. 특히 '설령 서로를 진짜 싫어하더라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구면'인 좁은 동네에서 살 때의 십대가 복잡한 감정이 잘 그려져 있다. 마을 안에는 갈 곳이 없고, 나가려면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려면 각오라는 걸 해야 하지만 그 모든 게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생활 방식과 서울로 대표되는 대도시에 대한 막연한 환상, 그리고 왜 이런 건 우리 동네에 없나 하는 의문이 잘 그려져 있다. 작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데 어떤 문장이나 일화는 내가 면 단위에서 살 때 느꼈던 감정을 무척 잘 그려내서 감탄하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면 단위 동네는, 소설의 배경인 오동면보다 더 시설이 부족한 곳이다. 농협과 농협에 딸린 작은 하나로마트, 학교 맞은편에 있는 동네 구멍가게가 전부였고 '이디야 커피와 세븐일레븐 편의점'조차 없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당연히 없었고, 중고교에 진학한 뒤에는 아침에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강제로 부지런해지거나 타의로 게으른 학생이 되어야 했다.
나는 지방 사람이 서울을 동경하는 것에 복잡한 마음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TV를 틀면 그 안에는 전부 서울(하다못해 수도권)에 사는 사람만 나온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프랜차이즈 카페나 식당이 PPL로 등장하고, 비슷하게 생긴 걸 본 적도 없는 차를 어떤 연예인이 타고 다닌다고 호들갑을 떤다(그런 차는 십중팔구 논두렁에 끌고 올 일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설계한 것처럼 생겼다). 내가 모르는 것이 계속 눈앞에 전시되며 이게 유행이고 멋이고 좋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떠는데, 나는 그게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하면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그런 멋진 것들이 없으니 나는 어쩐지 작아지고 초라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방에서 사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이런 감각이 일상화 된다. 물론 강원도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아빠가 모는 경운기 뒷자리에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미숫가루나 마시던 어린 정한새가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십대 후반의 내가 가졌던 소중한 꿈은 후추 뿌려진 스프가 나오는 돈까스를 먹을 수 있는 경양식 레스토랑에 가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나이를 얼추 먹어 이런 동경이 사회에서 만들어냈고 문화 속에 깔아 놓은 유해한 수준의 음모이자 세계관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아무래도 비판적인 태도를 조금은 가지게 된다. 결국은 서울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이 동경을 강화하고 동시에 지방에서 사람을 끊임없이 떠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방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해서조차 서울을 끌어와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 때는 당황스럽기도 하다. 서울에는 없는 게 지방에 있어서, 혹은 서울에 있을 수 없는 게 지방에 있어서 지방이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지방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보다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일자리 구축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만들고 다양한 사람이 오가게 해 포용성을 높여야 한다. 전 국민의 정보 및 생활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있어야 할 마땅한 조치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저조차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고(이건 조금 억울한 게 원서를 지방, 비지방 모두 넣었는데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만 날 합격시켜 줬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다가 사람 많다고 질려서 뛰쳐나와 다시 정착한 곳이 경기도인 걸요? 여전히 가끔씩은 아, 그래도 서울에서 살았다면 이런 강의, 저런 전시 가기는 편했겠지 생각하고 있는 걸요? 누가 날 비판한다면 두 손 모아 마땅합니다.
더불어 지금의 삶은 동시에 어떤 덫이기도 하다. 나는 경기도에 살면서, 강원도에 살 때보다 묘하게 더 서울을 향한 애착이 커졌다. 지하철 타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면 서울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는 미묘한 접근성이, 이 마음에 계속해서 불을 지르고 있다. 한 시간만 더 일찍 일어나면 서울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는데, 조금만 더 바지런하게 굴면 서울의 전시회를 갈 수 있는데, 일정을 이렇게 저렇게 조정하면 서울에서 진행한다는 퀴어 모임에 참석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들. 이런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불만과 무관심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나온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온가족이 시청한 적이 있었다. 저녁 시간까지 시간이 떠서 같이 아무 드라마나 적당히 보다가 출발하자고 하고 튼 드라마였다. 그런데 1화에서 경기도 사람을 무슨 박탈당한 사람처럼 그려놓은 것 아닌가. 현직 경기도민이자 전직 강원도민인 나는 보다가 그만 화딱지가 나버려 온가족(당연히 전현직 강원도민) 앞에서 성질을 내고 말았다. 경기도민이 보기에는 서울과 거기 사는 사람이 무슨 천상계처럼 보일지 몰라도 더 외곽으로 가면 그나마도 못할 사람이 천지삐까린데! 일단 수도권에 살면서 서울을 가까이 느낀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혜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나자빠졌는데, 가족 중 한 명이 '경기도민 다 됐네' 라고 말했다. 아니, 이거 비경기도민 마음 아니야? 하고 대꾸하려다가 문득 그런가, 싶어서 김이 빠졌다. 그런가, 내가 이미 서울을 가까이 느끼고 있는 걸까. 정작 몸과 마음도 비수도권인인 사람들은 저걸 봐도 늘 보던 유해한 음모론 중 하나여서 아무 생각이 없으려나.
오동면에 '카페, 공장'을 열었던 네 명의 주인공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길을 나아가는 끝을 맺는다. 네 명 모두 서울로 올라가버리는 끝이 아니라 누군가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누군가는 다른 지역에서 취직을 하고, 누군가는 오동면 옆의 칠동면에서 일하고, 누군가는 재수를 한다. 서로 다른 그 끝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감정을 배가시켜 주었다. 누구의 선택이 대단하지도, 혹은 위험하지도 않다. 그저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남는다는 단어에 담겨진 뉘앙스를 바꿔나가야 한다. 능력이나 돈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남는 게 아니다. 자기가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 누군가가 그러한 것처럼, 그저.
* 가족의 말을 뺀 인용 출처 전부 '카페, 공장, 이진, 자음과모음'
* 헤더 사진 책 '카페, 공장'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