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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씨 Nov 11. 2024

그 모든 기억을 단숨에 떠나보내기엔 섭섭하니까

이별 후 열심히 애도하고 여행하기

이별 후 해야 할 일: 잊고 있었던 것을 되찾는 일,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일, 없었던 그때로 돌아가는 일,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일


여행의 형태는 다양하고 목적도 다양하다. 나 같은 경우 교환 생활 중 여행은 새로운 경험과 체험, 그리고 지식 충족/보충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각 국가의 역사와 서양 미술사 정리의 기회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조금 다르다. 스위스는 어릴 적 마터호른에 오른 한 부자의 실화 바탕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1위로 등극했었고, 소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워낙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스위스에 대한 이미지가 나에게는 더욱더 남달랐다.


비록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스위스 맛보기를 하며 최근 이별을 겪은 나를 위로해보고자 했다. 매번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보고자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의욕이 불타오를 때 야심 찬 글쓰기가 시작되지만 마무리짓지 못하는 나는 스위스에 있는 동안 하찮더라도 끝장을 볼 스토리라인을 구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별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기에 충분히 돌아보고, 애도하고, 보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엄청난 자연경관, 드넓은 초록 들판과 파란 하늘, 그리고 만년설이었으나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풍경은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장도 많고 그래피티도 많이 보이고..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사랑은 너무 특별하고 달라 보이고 희귀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다 겪는 감정이라는 걸. 그렇지만 그 기억만큼은 다 다르다. 우리는 언어로 표현하지만 언어로 표현되는 지난 기억과 경험은 뚜렷한 촉각과 시각 등 너무나도 다른 형태의 감각으로 우리 뇌에 품어져 있다. 미국에 있을 때 그 친구는 차가 있기 때문에 자주 내 기숙사까지 데려다줬고, 한인 마트까지 몇십 분을 달려가 장을 보고 생긴 지 얼마 안 된 인생네컷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한국이었다면 지하철을 탔을 것이고 길거리에 즐비한 아무 포토부스에 가서 쉽게 사진을 찍었겠지. 그렇지만 상황이 다른 미국이었기에 그 사건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이제 막 독일의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넘어왔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성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정말 말 그대로 동화책에서 그림으로나 볼법한 '성'의 실재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보인다. 유럽에 온 지 한 달 반 정도 된 요즘, 문득 나중에는 내가 유럽에 있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과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기 전, 그러니까 완전한 친구였을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가면 내 마음은 더 말랑해진다.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을 하면서 인간관계로 많은 스트레스가 있었다.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들이 터졌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감정적으로 붕괴되었을 때 내 옆에 남아준 친구였다. 억지로 애써 하는 위로가 아니라, 그냥 말없이 묵묵히 내 옆에 항상 있어줬다.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서 미워하지 않고 안쓰러워하는 그 친구 덕분에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도 내 자존을 스스로 지키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 봄 방학 때 파리로 여행을 갔다 와서 공항으로 데리러 와 주었을 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서 고속도로 갓길에서 40분 넘게 서있었던 기억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 어쩐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애가 나를 좋아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고 여자한테도 인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보다 더 귀엽고 인기 많은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 친구 입장에서 내가 아깝다고 생각한 거다. 이렇게 말하니 정말 풋풋하고 간지러운 청춘 로맨스의 시작 같다. 사실 어쩌면 맞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 애의 마음에 어느 순간 찾아왔고, 나도 타이밍이 살짝 늦었으나 그 애의 마음이 사그라들기 전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운명의 장난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연애보다도 간지러운, 그 어떤 친구보다도 더 친구 같은, 아슬아슬한 사이가 되었다.


상황이 참 야속한 것이, 나는 다음 학기에 교환 학생으로 독일에 가고, 내가 독일에 가있는 학기가 그 애의 마지막 학기였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 친구는 졸업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있을 거다. 나는 그때 졸업하기까지 일 년이 더 남았을 거고, 졸업 이후에도 미국에서 취직을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짧게만 경험을 쌓고 한국에 돌아올 계획이지만, 우리가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나 안정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거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3개월 남짓인 것을 알았기에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려 하면서도 일정 거리를 두려 했다.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더 상처받고 슬프지 않기 위해.


한국에서도 서로의 본가가 굉장히 먼 거리였기에 몇 번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했다. 어떻게든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그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나는 새벽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까지 마중을 나갔다. 그 친구의 새 학기가 시작하고, 내가 독일에 발을 내딛고서도 우리는 각자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노력했다. 서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매주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가서 매 도시마다 엽서에 일상을 작게 담아 보냈고, 그 친구가 보낸 편지도 독일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에 연결된 채로 잠에 들기도 했다. 그 친구가 잠에 들기 전 한 번이라도 연락을 더 하기 위해 내 눈은 새벽 5시에 절로 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섭섭하게도 상황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제 슬슬 스위스다운 언덕진 풍경과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로 된 오두막과 날아다니는 새들의 조화가 예쁘다.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스위스를 방문해서 기분 전환을 하거나 영감을 얻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특히 시골을 보며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어떨지 자주 상상해보곤 한다. 나는 미국에서,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지 않은 교외에 살면서 어찌 보면 시골 생활의 불편한 점들을 이미 겪어본 것일 수도 있겠다. 차가 없기 때문에 우버를 잡거나 차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지 않는 이상 나는 기숙사와 캠퍼스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곳의 이런 시골은 그런 단점을 가리는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독보적인 장점이 있기에 경험해보고 싶다.



독일 온 이후의 그 친구와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보자면, 그 친구는 이번 학기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바빠졌다. 연구실에서 연구에 매진하며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학부생 주제에 대학원생 수업을 듣는 바람에 남는 시간마다 잠들기 전까지 논문을 읽으며 지냈던 그 애의 하루에 내가 들어올 틈은 크지 않았다. 나는 일생일대의 경험이라고 큰 마음을 먹고 타지에 온 이번 학기가 그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신경 쓰며 지나가길 바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놓아주기로 했다. 많이 아프지만, 서로 좋았던 기억만 남기고 나중에 더 좋은 모습으로 웃으며 만나길 바랐다.


사실 헤어지고 나서 정말 많이 울었다. 아직도 그 울음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시점이지만 며칠 연속 쏟아내고 나니 많이 괜찮아졌다. 미워하지 않는 사람을, 아직 좋아하는 사람을 보내주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서로 좋아하고 아끼는데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니. 내가 조금이라도 더 어렸다면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계속 장문의 문자를 보내거나 참지 못해 전화를 걸어 붙잡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배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그걸 그저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가 있다는 거다.



일기 예보는 분명 내가 도착하는 날부터 떠날 때까지 흐리다고 했는데, 왜인지 햇살이 뜨겁다.

취리히는 내가 생각한 스위스와는 많이 다르다. 쌀쌀한 날씨와 강을 끼고 있는 도시 풍경, 그리고 오래된 뾰족한 건물들이 스톡홀름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저녁으로 비싸지만 맛있는 치즈 퐁듀를 먹은 후 다다이즘이 시작된 장소라는 카페에 갔다. 그곳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재미난 책들도 많았는데, 사실 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된 작년 여름, 종로의 한 재즈 북카페에서 다다이즘 관련 책을 읽으며 다다에 빠졌다. 그리고 우연히 오늘 이곳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운명적인가? 살인적인 물가에 나는 이만 가장 저렴한 맥주를 골랐고, 맥주를 마시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스위스 4인 무리와 카드게임에 동참했다. 그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유럽과 미국의 문화 차이,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차이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 걱정 없이 새로운 사람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런 새로운 공간과 경험과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묘미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정말 중독성이 강한.



어쩌면 돌고 돌아 드디어 이런 사랑이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전에 나와 엮인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모두 지금 이 친구와의 소중한 인연을 위해 거친 전 과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헤어지고 마지막으로 3시간가량 통화를 하며 서로에게 얼마나 진심이었고, 얼마나 고마웠는지에 대해 토로했다. 어쩌면 나중에 정말 웃으며 만나서, 그때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때까지 마냥 기다리겠다는 게 아니라, 그날까지 각자의 삶에 몰두해서 좋은 상황을 맞이할 수 있기를, 나 스스로를 응원하면서 동시에 그 친구도 응원한다.



루체른으로 향하는 기차 안. 취리히 호를 옆에 끼고 달린다. 잔잔하고 길게 펼쳐진 호수와 옅게 낀 안게 사이로 지붕과 윤슬이 반짝인다. 호수를 두고 육지 사이로 연결되는 다리가 없고, 물살은 너무 매끄럽고 잔잔해서 발을 디뎌도 빠지지 않을 것만 같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코가 시큰해졌다. 내가 바라던 스위스의 경관이 눈앞에 너무나도 담담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하얗게 쌓인 눈에 눈이 부셔 잘 떠지지 않았다.


리기산 정상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다시 정상에서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사그라든다. 단단하고 거대한 바위가 하얗고 부드러운 눈으로 뒤덮인 모습은 무서우면서도 다정했다. 넓고 웅장한 자연의 광경은 역시나 대단했고 산을 보면서는 아무 이유 없이 울컥했다. 정말 아무 이유와 생각 없이 그저.

식당이 두 군데가 있었는데 정상과 가까운 곳에는 컵라면이 없었다.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 그 식당에 컵라면이 있는 것을 먼저 알았다면 완벽했을 텐데. 아쉬운 대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기 전 리기 맥주를 10분 만에 들이켰다. 이상하게 알딸딸해지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설산과 햇살과 낮아진 기압이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비츠나우에 내려와 어쩌다 배를 놓쳐 한 시간가량 시간이 남아 거리를 돌아다니며 호수에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갈매기도 아닌 이상한 새들이 야생적으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 넓은 호수와 설산을 정면으로 바라본 채 혼자 그곳에. 벤치에 앉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어딘가 모난 곳이 없어 보인다. 큰 걱정도 없고 자존이 단단해 보인달까. 물론 나는 표면적으로만 봤기 때문에 잘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이 준 영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사랑의 본질은 추모와 같다.’라는 제목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있는데

나는 추모하고 애도하고 사랑을 보내주기 전 마지막 곱씹음을 하고자 이 여행의 시작부터 글을 끄적였건만

막상 돌아가기 전날 밤인 지금은 더 이상 많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건가 싶기도 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어떤 것을 가득 채워서, 공허한 빈 공간이 없어졌으면 했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채우고 있던 그 사람의 흔적이 이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비워야 하기 때문에 빈 공간이 생겼지만

이틀간 스위스에서 자연과의 조우가 그 흔적의 경계를 살살 문지르며 자연스럽게 번져 없어질 수 있게 해 준 것 같다. 그리고 힐링으로 채워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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