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넓은 땅덩어리의 선거 방식
이번에 처음으로 미국 대선에 투표를 경험해 봤다. 한국과 독일(영사관)에서 한국식 투표는 해봤으나 미국인 신분으로서 미국에서의 투표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투표소는 집 근처 교회였고, 직원분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긴 줄을 예상했지만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라 꽤나 조용한 분위기였다. 여권 대신 이번 여름에 인턴 할 동안 뉴욕에서 만든 뉴욕 주 ID를 사용했는데, 바코드를 스캔하며 직원분들이 이제 세상이 좋아져서 다른 주 ID도 인식된다고 감탄하듯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번이 나의 첫 투표임을 알게 되자 "We got a first voter here!"라며 모든 사람들이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환영을 받아 당황하면서도 사실 조금 감동받은..
투표 방식도 새로웠다. 우선 미국에서는 투표하기 전 반드시 미리 신청을 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학교에서 신청을 도와줘서 9월 초에 해놨었다. 투표소는 개인마다 차례로 가림막 안에 들어가서 투표하는 게 아니라 기둥처럼 생긴 기계에 짧은 칸막이가 둥글게 네 칸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열린 공간에서 투표하는 느낌이었다. 투표용 카드(voter card)를 기계에 넣으면 터치스크린에 후보 목록이 뜨는 방식으로, 상당히 디지털화되어 있었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상원 의원, 지역의 여러 공직자 후보를 선택해야 했고, 후보 이름 옆에는 democrat(민주당), incumbent(현직 의원) 등 간략한 정보가 괄호 안에 적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 헌법 조항 수정안과 관련한 투표 항목도 포함되어 있어 내가 이 법안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선택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주요 정책뿐 아니라 주 헌법까지도 투표로 일반 국민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점이 신기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투표를 마친 후 종이가 그 기둥 같은 기계에서 다시 인쇄되어 나왔고, 종이를 접지 않은 채 다른 기계에 넣어 제출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자 직원분들이 다시 한번 박수로 축하해 주셔서 약간의 민망함과 함께 감사 인사를 하며 기쁜 마음으로 투표소를 나왔다. 귀여운 투표 인증 스티커들도 잊지 않고 챙겨 왔다. 조지아 같은 경우는 복숭아 디자인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이후 라이브 개표 방송을 지켜봤다. 개표 초반 트럼프가 우세를 보였는데 이는 예상된 부분이었다. 선거인단이 적은 주의 결과가 개표가 빨리 끝나기 때문에 먼저 발표되고, 이러한 주들은 대체로 공화당의 텃밭인 빨간 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지아와 펜실베이니아 같은 swing state에서도 공화당 우세가 점쳐지자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인단 제도로 인해 직접 선거가 아닌 간접 선거, 즉 간선제에 가깝다. 주마다 선거인단 수가 달라서 지역적 편차가 크고, 특히 선거구를 나누는 방식에 따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흑인이 밀집한 지역은 더 작게 나누어 분산시키거나 백인 동네와 합쳐지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같은 민주당 지지자라 하더라도 파란 주인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의 표와 플로리다에 사는 사람의 표는 영향력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캘리는 항상 파랗기 때문에). 이는 모든 표가 동등하게 반영되는 한국의 직접 선거 방식과 비교해 볼 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날 인스타그램 스토리들이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찼다. 미국 대학생들은 (주와 도시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주된 반응으로 수차례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 대표적이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상원에서도 공화당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해리스 지지자들이 한층 더 실망과 좌절을 느낀 것 같다. 내가 속한 비즈니스 스쿨에서는 정신적으로 힘든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제공하는 무료 심리 상담 서비스가 있다는 걸 리마인드 해주는 공지가 올라오기까지 했다.
마케팅 교수님은 이번 당선 결과를 갖고 트럼프는 사람의 감정 요소들 중 '두려움'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라고 했다. 해리스는 이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려 했다면, 트럼프는 당장 이렇게 안 하면 우린 망한다고 어필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fear에 약하고, 이는 마케팅 전략에도 적용된다.
이번 기회로 미국 선거 방식의 복잡함과 그로 인한 논란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 투표에 참여하며 새로운 시스템을 접한 점은 신기하고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선거 방식 자체에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미국은 변화에 발 빠른 편이 아니라서 과연 언제쯤 바뀔지는 모르겠다). 트럼프 당선 이후 바뀔 정책과 이민자법, 이에 따른 취업 시장 변화, 국제 정세 등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