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힌 페이지 위로 흐르는 온기

일상의 아늑함 - 새벽 책 읽기

by 감지





창밖엔 신호등만 깜빡일 뿐,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고요한 새벽이다.

이런 새벽은 책 속의 숨결을 듣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려온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 한 권을 꺼내 든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손길을 거쳐

모서리는 닳고,

페이지마다 지난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다.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스님의 말씀과 이야기를 품었을까.

책장을 넘기다

문득 마음에 걸리는 글귀를 만나면,

같은 구절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는다.


이제는 술술 읽히는 책 보다,

자꾸만 책장을 덮고

사유하게 만드는 책을 곁에 두고 싶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히는 책이어야 한다.

그 구절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글귀에 눈이 고여

더는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가만히 표시를 해둘까 하는데,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 페이지는 조용히 접혀 있다.

나도, 그 누군가도 함께 멈춘자리.


시간을 함께하고 있지는 않지만,

감정을 함께한 자리이다.



얼굴 모를 타인과

마음이 깊게 통했다는 사실이

새벽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운다.


그 사람은 어떤 밤에 어느 시간에

이 책을 펼쳤을까.

나처럼 잠을 잃은 새벽이었을까,

아니면 어느 오후의 햇살 속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같은 문장 앞에서

같은 속도로 느려졌을

그 마음만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책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한 문장 위에

조용히 불러 모으는 것.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말했지만,

나는 오늘 밤

이 낡은 책 한 권으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얻어버렸다.


접힌 페이지 하나,

그 안에 깃든

누군가의 고요한 떨림.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책을 덮는다.

신호등은 여전히 깜빡이고,

새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른 새벽이다.


낯선 이의 손길이 스친

페이지를 가슴에 얹은 채,

나는 이 밤을

더 오래 붙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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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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