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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23. 2024

사소한 일로 드러난 깊은 상처

17

그동안 나와 멀어지고 떨어지고 싶어했던 가족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출산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진정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시작점에 서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 부모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는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그 가족의 인연을 계속 이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다면 충분하고, 아이들과의 관계는 돈독하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제주에 떨어져 살면서 가족이라고는 나와 남편뿐인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들이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내리사랑'을 아이들을 통해 대리 만족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의 부재가 막연히 그리웠던 걸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는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만이 전부였던 나였다.


그래도 아예 부재보다는 어색한 존재가 훨씬 나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아, 나도 있었어'라고 공감하며 응대할 수 있는 존재의 기억이 타인들과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계속 가르쳤던 것 같다. 일 년에 한 번 볼까 싶을 정도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비록 나에게는 처음이라 서툴렀고 상처를 많이 줬던 부모였지만, 그들이 손주인 내 아이들에게 웃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았던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지난번 남편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에 내가 스스로 닻을 매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히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상처가 쉽게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8개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때의 상처가 남편과의 관계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둘째가 백일이 되던 때였다. 새해가 되어 새해맞이 겸 둘째 아이의 백일 기념으로 부산에 홀로 계신 시아버지를 제주로 2박 3일 초대했다. 시아버지를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큼 몸과 마음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예의상, 도리상,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그냥 행한 것이었다. 손주인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일종의 암묵적 메시지를 담은 초대였다. 그저 아이들과 친할아버지 간의 끈을 위한 자리였다.



귓구멍까지 시릴 만큼 추위를 뚫고,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혼자 마트에 가서 20만 원어치 장을 봐왔다. 소고기, 전복, 갈치 등 평소에 혼자 사다 먹지 않을 비싼 식재료들을 가득 담아 힘겹게 들고 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을 드시며 시작하는 시아버지의 하루 일과에 맞추어드릴 수 없었던 나는 성냥개비로 눈을 벌리듯 억지로 눈을 뜨고, 물을 잔뜩 먹어 축쳐진 빨랫감처럼 무거운 몸을 어그적대며 이끌고 거실에 나왔다. 자는 아이들과 남편을 조용히 뒤로 하고 주방에서 뻑뻑한 손목을 굴려가며 바쁘게 준비했다. 정성을 담아 계란을 지단으로 부쳐 가늘게 썰고, 김과 파를 송송 썰어두었다.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한우 소고기 떡국을 끓이며 요리 혼을 발휘하던 중, 주방 창밖으로 시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식사 이제 곧 하셔야 하는데, 어디 가시지?' 나는 더 바삐 움직였다.



전날밤 간단히 요기하실 만한 것을 남편이 미리 챙겨드린 걸로 알고 있었고, 워낙 건강하셔서 잘 돌아다니시기에, 가볍게 산책이라도 잠깐 다녀오시려나 보다 생각했다. 오전 8시가 넘어 완연한 아침시간이 되었을 즈음 남편과 아이들이 하나 둘 깨기 시작했다. 괜스레 느껴지는 불안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채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남편에게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아버지한테 전화 좀 걸어봐요, 어디 가시는지." 내 삶의 도식에서 느끼던 직감적인 불안들은 항상 불안이 맞았다.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예, 어디요?"

"밥 묵으러 왔다."

"거가 어딘데요?"

"순두부, 거 예전에 맛있더라."

"예, 알았시요."


전날밤 간단한 요기를 남편이 미리 챙겨 드린 걸로 알고 있었고, 건강하셔서 산책이라도 나가시려나 생각했다. 완연한 아침시간이 되었을 즈음 남편과 아이들이 하나 둘 깨기 시작했다. 괜스레 느껴지는 불안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채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남편에게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아버지한테 전화 좀 걸어봐요, 아버지 어디 가시는지." 내 삶의 도식에서 느끼던 직감적인 불안들은 항상 불안이 맞았다.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내 직감이 맞았다. 



‘알았시요? 알았다고?!’ 순간, 아침 상차림 과정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젓가락으로 김치를 꺼내들며 손가락을 바라보던 내 눈동자는 심하게 요동쳤고, 나의 애씀과 노력이 두 남자의 몇 마디 만으로 깡그리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알았다니요?!, 얼른 오시라고 해야죠. 식사 다 됐는데, 지금 오시라고 해야죠!"

"이미 먹고 있다 잖아."

"아버지 나가실 때 이미 환풍기로 음식 냄새 다 맡고 가셨을 건데, 요리하는 걸 알고 계셨을 텐데."

"원래 아버지 일찍 드시잖아. 됐어. 우리나 먹으면 돼."

"아니, 지금 그게 아니잖아요!!"

"뭘?!"


배가 고파져 혼자 식사를 마치고 똘래똘래 돌아온 시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다. 시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제 갓 눈을 떠서 비비적거리며 본인 아버지에게 어디냐 묻고 알았다 대답한 남편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침을 차려드리지 못한 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아버지가 제주에 처음 오신 게 아닌데 아침 식사를 8시나 9시쯤 한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 나는 그게 단순한 경상도 지방 사람들의 사고방식인지, 혹은 남자들 사고방식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도 미웠지만 시아버지도 너무 미웠다. 미운 마음과 짜증이 용이 불을 뿜듯 솟구쳤다. 겉으로 불이 보이지 않을 뿐, 이미 남편은 내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숨소리, 날카로워진 말투로 알았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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