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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숱한 사건사고들을 겪으면서 누구보다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했고, 그 단단함 들은 쿨내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심장이 튀어나갈 만큼 크게 반응하거나, 그 생각과 감정에 얽혀 꼼짝 못 하는 시간이 있을지라도. 금방 잊고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살게 되는 습성이 나의 쿨함이라고 여겼다. (정말 기억을 부분 부분 잘 지워버리는데 이건 두 번의 출산을 겪고 더 심해졌다. 출산과 동시에 인지기능이 손상된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종종 하기도 한다. 치매 초기증상을 검색해 보면 해당하는 게 여러 개 눈에 들어와 솔직히 가끔은 치매가 두렵다.) 외향적이고 쾌활한 성격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도 내가 쿨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아니, 마음 여러 곳에 옹졸한 구석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나는 결코 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이 시아버지와 아침밥상에서 이어진 둘째 아이의 백일 상차림이었다. 어느 육아 박람회에서 후기 이벤트를 했었는데 성심껏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했더니 감사하게도 베스트 리뷰에 뽑혀 백일상 대여업체의 1회 무료이용권을 받게 됐다. 백일상 대여라 해봤자 기껏 5만 원 정도에 그치는 소소한 혜택이지만, 수입이 일절 없던 나에게는 생계에 보탬이 되는 또 다른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그만큼 시간과 마음을 썼던 나의 에너지에 대한 보상이었다. 나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음을, 당신과는 결이 조금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일 뿐 나도 마찬가지로 가정경제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도 '일'임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집에 도착한 큼지막한 푸른색 이삿짐 상자 안에는 주의사항에 대한 안내와 함께 백일상차림을 위한 여러 대여물품들이 들어있었다. 포도나 사과, 오렌지 같은 모조과일과 함께 그걸 올릴 수 있는 고급스러운 나무접시, 실제 떡을 올릴 다양한 모양의 도자기 접시, 모조 백일 케이크와 그것을 올릴 수 있는 나무 케이크판, 고급스러워 보이는 조화를 꼽아둘 화병 두 개, 아이의 이름과 함께 축백일이 프린트된 종이가 끼워진 금빛 테두리의 작은 사각 액자, 액자와 화병을 올릴 작은 나무상, 휴대용 간이 테이블과 흰 식탁보, 백일이 한자로 쓰여 있는 벽걸이용 현수막, 오색실패와 단지 같은 것들이 여러 사람의 손길이 거친 흔적이 남은 비닐에 고스란히 씌워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어떤 색이 내 아이 얼굴을 가장 잘 살릴까, 어떤 디자인으로 골라야 사진이 잘 나올까 수차례 고민하며 직접 골랐던 한복도 함께. 어떤 색감의 조화를 해두어야 한 번뿐인 백일 사진을 잘 찍어줄까를 업체 홈페이지를 수없이 들락날락했다.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며 여러 현수막과 한복, 그리고 구성품들을 캡처해서 이 조합과 저 조합 여러 번을 콜라주 하며 짜깁기해 나만의 샘플을 만들었다. 그 상자는 단순히 업체가 보내준 상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고민했던 나만의 정신적 고뇌의 결과물이었다.
떡을 받는 시간은 더욱 세밀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아이가 울지 않고 짜증 내지 않을 시간, 한복을 입히고 벗기는 과정과 의자에 앉혔을 때 웃으며 사진 찍혀줄 수 있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을 분석해야 했다. 100일간의 아이의 생활리듬과 패턴을 파악해야 했다. 수유시간과 수유간격도 그리고 낮잠 시간을 고려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울게 되고, 한번 울기 시작한 아이를 달래다 보면 그걸로 백일상은 끝이 나니까. 이왕이면 갓 쪄서 따뜻하게 나온 떡을 올리고 먹고 싶었다. 그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여 고르고 골랐던, 제일 나을 것이라 판단되는 내가 원했던 시간에 맞추어 세 개의 떡 상자도 마침내 집 앞으로 도착했다.
백일떡도 그냥 아무 떡집에나 전화해서 시키는 게 아니었다. 동네 인근 떡집부터 시작해서, 다른 동네 떡집까지 여러 떡집들을 찾아 전화해 가며 백일 한자 글씨가 어떻게 찍혀 나오는지를 물었다. 대부분 '百'만 쓰여있는 곳이 많지만, 백일 '百日'인 곳도, 한글로 '백일'인 곳도 있고, 숫자 '100'이거나 하트가 들어간 곳도 있었다. 또 같은 百 글자여도 서체가 다르고 색감도 달랐다. 어느 곳은 검은색이고 어느 곳은 갈색이었다. 같은 백설기여도 정사각형인 곳도 있고, 약간 직사각형인 곳도 있었다. 떡의 가로세로 크기는 어떠한지, 백설기 사이에 꿀이 들어가 더 달콤하게 해주는 꿀설기가 기본값인지 아니면 추가비용을 내야 하는지도 물어야 했다. 수수팥떡과 오색송편을 함께 구성했을 때 떡의 개수는 어떠하며 가격이 어떠한지, 주문이 가능한 기본단위가 떡 한 말인지, 아니면 반 말도 가능한지 확인해야 했다. 떡 한 말에 몇 개의 떡이 나오는지를 파악하고, 상차림에 올릴 떡과 주변에 나눠먹을 떡의 개수를 고려하여 계산해야 했다. 그러려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부담 없이 나누고 떡을 나눠 먹고 백일의 의미를 함께 축하하고 싶은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제일 중요한 떡 맛을 예상하기 위하여 각 떡집에 대한 후기가 어떠한지도 온라인 포털에서 샅샅이 리뷰를 찾아 뒤져가며 비교했다. 그렇게 가성비도 좋고 맛도 좋으며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떡집을 골라 받은 떡이었다. 떡집에서 알아서 쪄서 그냥 보내준 단순한 떡상자가 아니라, 나의 수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또 하나의 결과물이었다.
그랬다. 나는 기존에 누군가가 다 만들어둔 것에 쉽게 만족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여러 옵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받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도, 내 기호와 취향에 뭔가 아쉽고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율하고 바꾸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디테일 하나하나에 섬세한 거지만, 작은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신경학적으로도 심리사회적으로도 나는 예민한 사람에 속했다. 전혀 쿨하지 않은 사람. 그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