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의 봄

by 감성의 긁적임

<오뉴월의 봄>


기억하고 있지 않는 밤
아니, 기억되지 않는 밤
너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힘겹게 떠올려 본다.

명랑했던 네 웃음소리는 어떠했는지
갈색빛의 네 큰 눈은 어떠했는지
숱한 기억들 속에 파묻힌
네 자취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다.

하루에 한 번씩
땅이 해를 품었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하듯
흔한 사랑이었고
흔한 이별이었다.
그래서일까
너를 떠나고 잊는 일
내겐 참 쉬운 일이었다.

늘 그랬듯
아침 공기가 가을을 열던 보통의 날
길을 걷다 파삭 낙엽 밟히는 소리
너와 같이 밟았던
가을 길거리의 낙엽 하나가
고작 그 하나가
그리움의 댐을 무너뜨려
너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땅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여름 비도
창공에서 불어오는 가을 바람도
흰 구름 조금씩 떼어 내려오는 겨울 눈도
봄 햇살 한 가닥조차 지울 수 없었다.

봄의 끝자락마다
너 또한 나를 그리워하길
멀리 나 있는 이곳에서
익숙한 네 웃음소리만 들리길
그것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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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어쩌다 마주친 풍경 하나, 우연히 들려온 익숙한 멜로디 하나, 거기에 담겨있던 추억들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참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이내 현실로 돌아왔을 땐 그 시간들이 머릿속에 더욱 각인됐다는 걸 느낀다.

기억하려 해도 기억되지 않는다 말했지만, 너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또 한 번 나를 부정한다. 분명히 행복한 시간이 있었고 너를 떠날 때 서로 좋은 추억만 기억하기로 말했던 나였지만 너를 잊기 위해 너를 밉게만 기억하고 나쁘게 추억했다. 하지만 이런 발버둥도 사소한 추억 하나로 터져버린 그리움의 물살에 무력해졌다.

나희덕 시의 한 구절처럼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길이 실은 네게로 향했던 길이었다. 봄이 끝날 즈음에 봄이 가장 그립듯, 너는 내게 오뉴월의 봄이다.


베니스의 봄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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