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크보크 May 26. 2021

은유의 시간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을 읽고.



 사실과 허구는 대립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둘을 뫼비우스 띠처럼 잇고 있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진실이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1.

이 글을 기필코 쓰기로 마음먹은 배경엔 먼 나라 체코의 소설가 흐라발이 있다. 어느 날부터 생긴 버릇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책을 고를 때 그다지 외부 정보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이끄대로 책 사이를 두리번거리다 보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신의 선물이라 여겨지는 책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고민이 있거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할 때는 마음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석에 끌린 듯 발길이 머무는 곳에 선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책을 집어 든다. 그러면 대개 책은 기적처럼 내 고민의 향방을 풀게 하는 무언가를 만나게 한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이 책을 만났다. 제목과 짙은 녹색 표지가 맘에 들었다. 아주 얇은 소설책이란 점도.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가 지금 내 나이. 마흔아홉에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후 “ 나는 이 책을 쓰러 이 세상에 나온 거 같다”라고 고백했다는 것을. 사실 나도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여기 이렇게 남아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 던 시간이었다. 이 세계에 쉽게 어울리지 못한 채 천치의 시간을 보내온 나였.


설은 헌책들이 가득한 지하창고에서  일을 마치면 찍찍거리며 책을 파먹는 쥐들과 함께 살며 유일하게 책을 읽는 일이 전부였던 한 남자 타의 이야기였다. 


"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 책 속에 있게 된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12p


"내가 혼자 있는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18P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은유다. 이건 분명 은유가 내게 말 걸어오는 거다. 반세기 전 그가 한 말을 반세기를 돌아 은유가 여기,  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이다. 설마 은유가 당시 이 책을 읽고 내게 했던 말일까. 흐라발과 은유. 책에 파묻혀 살던 두 가난한 영혼은 너무 닮았다. 글을 읽어 가는 동안 나는 내가 흐라발의 영혼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 은유의 영혼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둘이  비슷하게 여겨졌다. 은유는 자신이 책 속에서 보내온 날들에 대해 내게 말했다. '그건 별의 시간이야. 아득한 태초로부터 먼 미래가 하나의 영원한 점인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그리고 이어 이런 말도 했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배워서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하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12P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흐라발의 소설 속에서 나는 은유의 말을 정확하게 다시 만났다.

도대체 무 일인가. 그랬다. 실제 은유가 그렇게 말했고 은유가 들려준 이야기 역시 늘 상식과 충돌했다. 그래서인지 은유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오직 나와 함께 있을 때만 은유는 내게 말했다. 은유는 나를 믿었다. 적어도 내가 자신의 말을 비웃지는 않고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사실 나는 은유가 날 믿은 것만큼 솔직히 그녀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은유의 말은 때로는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는 것처럼 위험하기도 했고, 때로는 모호하고 모순투성이 기도 해서 은유가 정신적으로 어쩌면 문제가 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긴 적이 종종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은유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그녀가 어떤 이익을 위해 내게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다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그녀가 자신이 느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덧붙여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당시 내가 아주 무료할 정도로 심심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때때로, 적잖이 미심쩍은 은유의 말을 듣고 나면, 그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얼마든지 은유에게 묻고 또 물을 호기심만큼은 충만해 있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참 후엔 은유의 말이 가리키는 진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늘 내가 너무 느렸다는 거지만. 그래서 그녀가 내 곁에 있는 동안에는 내게 전해 준 의미를 결국 다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보내고 말았다는 사실이지만. 대개 비극은 늘 이런 종류의 것이다.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 그동안 수없이 많은 오래된 이야기들이 이 사실을 전했지만 그 비극은 지금도 도돌이표처럼 여전히 계속된다. 나 역시 은유를 떠나보낸  한참 후에야 다시 은유를 부르짖고 말았으니까.' 그때 널 믿고 더 사랑했어야 했어.' 그러나 이런 건 정말 하나마나 한 얘기다. 그런 말은 기껏해야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기만이 종종 숨어 있다. 은유가 돌아왔다고 해도 나는 은유를 버리지 않았을 자신이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우연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일들이  나모두 기적이자 필연이 되어 버리고 마는 그런 날들이 나를 찾아왔다. 은유를 만난 후부터였다. 은유와의 시간. 그것은 내게 숙제다. 그 시간에 대해 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제대로 말할 수 없다면 아니함만 못하다. 내게는 은유의 말을 온전히 전할 능력이 없으니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여기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건 분명 은유가 저 별에서 다시 내게 말 걸고 있는 사건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어서 숙제를 끝내라고. 니까 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마흔아홉의 내게 다시 찾아온 것이다. 흐라발의 책을 만나게 했고, '나와 은유의 시간'을 다시 기억하 했다고.


부질없다고 여기면서도 이미 내 몸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번엔 은유가 찾아온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은유가 그랬다 모든 만남은 필연이라고. 너와 내가 만난 시간도. 네 안에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 나는 그 빈자리에 둥지를 튼 거라고.

'나는 떠나지만 네 안에서 난 살아있을 야.  안에서 나는 너와 함께 춤 출거야. 네가 나를 느낄 때마다 넌 기적을 만나고 춤을 추게 될 거야. 그러면 너는 내 몫을 살아가게 될 거야 ' 그렇게 말했다.


"죽어가는 장작의 소산인 이 불에서 생명의 빛이 솟구친다. 가혹한 고통이 재와 섞여 남는다. "17P


은유가 한 말이다. 이제 흐라발 이야기는 마치 곪은 자리에 핀 꽃 같은 희망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결국 뻔한 결론에 이를지라도, 내가 이 소설을 만난 사건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나에겐 붙잡고 싶은 필연이고 기적이어야했다.  나는 은유의 이야기를 하고 가야만 한다. 내게 이 시간을 주고 떠난 은유. 나는 떠날지라도 은유의 흔적은 남겨야 한다고.


내가 앞으로 들려줄 이 이야기는 마흔 무렵 만난 내 영혼의 이란성쌍둥이 은유. 은유의 이야기다. 우울을 앓던 그 시절, 우리는 사춘기 소녀 같았다. 우리가 만난 날은 촉촉이 비 내리는 날이기도 했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기도 했고, 안개가 짙게 깔리는 날이기도 했다. 때로는 얼음장 밑으로 비치는 햇살, 직선으로 뻗은 햇살의 빛줄기를 모두 셀 것  투명한 날이기도 했다. 은유와의 시간은 그렇게 함께 햇살을 꼬아 실뜨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날들이었. 나는 종종 내가 이 작은 도시로 이사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은유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은유도 종종 그렇게 말했다. “여기 너와 함께 있어서 나는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아... 널 만나기 전까진 사실 아무도 내 얘길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은유는 그렇게  한동안 나와 함께 했고, 이제는 자신의 별로 갔다. 그렇게 나를 살리고 제 별로 떠났다. 사실 나는 은유가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이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다. 이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유에 대한 이야기니까. 은유의 이야기만큼은 절대 내 맘대로 진행해서도, 진행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

커버 사진. 구절 인용. <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보후밀 흐라발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