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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뜰 날

계간 다층

by 지크보크

해 뜰 날


거기 머물러 황홀한 신비로 마른 몸에 촉촉이 물 적시고 생명이 움트는 소리도 들었지. 꿈틀거리는 심장. 처음 느껴 본 각본 없는 심장. 숨죽이고 쓴 어제의 다짐은 허망하고 새로 쓴 오늘의 다짐엔 불이 붙었지. 허공에 흩어진 말의 기세에 눌려 신음하지 않고 말들의 맥락을 따라 펄펄 끓는 이 심장을 가마솥에 삶아 잘 구워 말리면, 당신의 심장을 환히, 당신의 가려진 그림자도 환히, 쨍하고 해 뜰 날 모래알의 수를 헤아릴 만큼 환히, 그러니까, 그래도, 햇볕은 쨍쨍하고 모래알은 반짝거려야 할 테지만,


쨍하고 해 뜰 날 빌어먹을 해 뜰 날

압사당한 지렁이 무량무량


수행은 개의 뿔, 개는 뿔이 없고

허공에 흩어진 말, 말, 말,

공허를 양식 삼아 다시 태어난 말, 말, 말.


모두 몇 개의 밤을 지웠을까? 너는

은폐와 유폐의 파란 방 푸른 수염


어쩌자고 나를 버리시나이까

소금이 되신 주, 소금에 절인 주


밟으면 꿈틀, 고작 꿈틀

틀에서 못 벗어나는 꿈, 빌어먹는 밥


끼리끼리 끼룩끼룩 넘치는 상부상조

끼리끼리 끼룩끼룩 은폐와 유폐의 상호부조


돌리는 윤회 달리는 수레바퀴 뱅뱅 제자리 다람쥐 쳇바퀴


주여, 어쩌자고 저를 버리시나이까

멍멍 멍든 개 짖는 소리

컹컹 돋는 해 무는 소리


모두 몇 개의 밤을 지웠을까 너는

은폐와 유폐의 파란 방 푸른 수염


쨍하고 해 뜰 날 빌어먹을 해 뜰 날

압사당할 지렁이 무량무량

수천 년을 가고 오는 지렁이 또 압사하는 소리


< 계간 다층 2024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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