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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Feb 23. 2021

한 개인의 창조 서사 여정을 엿보다

자신만의 창조 서사를 쓴 승윤에게

"너의 노래는 방구석 찌질이로 내몰린 영혼들을 어루만진 위로였어."  


사실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다. 로또의 행운은 극히 소수의 몫이고 대개의 참가자들은 들러리가 될 뿐인 경연 방식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무대가 본래 그렇다 인정하려 해도 공들인 그들의 시간과 노력은 차치하고라도 참가를 위해 쓴 경비조차 제대로 보상받을 수 없었다는 후문을 최근 지인을 통해 듣고 씁쓸한 감정은 더욱 증폭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대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소수에게 모든 것이 집중될 뿐, 탈락자들이 그 과정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 대중 앞에 발가벗겨진 채 겪어야 할 심리적 고통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둔감해 보인다. 그들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못한 채 희망고문을 당하며 자신의 노력과 실력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견디는 모습은 때로 씁쓸하다 못해 처량하다.

왜인지 모르겠다. 로마 원형 경기장이 떠오르는 건. 검투사가 된 노예들이 피를 흘리며 자신의 동료와 싸우고, 관중들이 승리자에게 환호를 보내는 동안 그늘에서 하나 둘 죽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

더 세련되고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을 뿐, 본질은 그리 다를 게 없는 오래된  서열 놀이와 점수 놀이. 유독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연 방식은 사회 구조의 축소판을 극대화해 보는 듯해 불편한  바닥 정서를 자극한다.

누군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패자들의 꼬이고 뒤틀린 감정 정도로 치부하는 풍조도 여전해 보인다. 그래도 경연은 기회균등의 정의로운 구조라고. 대중에게 알릴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며 참가하기 전 마음을 돌아보라는 조언까지 서슴지 않은 경우, 그저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정말 난 늘 밀려난 패자의 삶을 살아온 탓에 경쟁에서 살아남은 승자에게 제공되는 몰아주기와 능력 지상주의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걸까. 기회는 모두에게 정말 공정까. 실패 꼭 패자. 때론 승패를 가르는 세상의 기준이 너무 천박했던 것은 아닐. 패자의 노력과 능력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무참히 살해당해도 좋을까. 특별한 재주와 노력으로 살아남은 승자라고 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승자독식 과연 승자의 영혼을 위해서도 좋을까. 승자는 죽어나가는 동료 앞에서 마냥 기쁠 수 있을까.  언젠간 자기 차례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왜 우리의 상상력은 보다 나은 방식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의 꼬리를 문다.

가볍게 보는 오디션 프로를 보며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한다고, 너는 왜 그리 부정적이냐고. 왜 그렇게 꼬였냐고, 어디선가 또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분명 방구석 찌질이 본능이라고 비웃음 당할 것만 같다. 사실 그런지도 모른다.    



 

그 무렵이었다. 방구석에서 멍하니 채널을 돌리다 이승윤을 보게 된 건. 싱어 게인 역시 기존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곳엔 이러한 경연 방식에 문제를 던지는 참가자 이승윤의 언어와 몸짓이 있었다. 그가 날 사로잡았다. 그는 그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 느꼈던  불편한 감정들을 정확히 대변했다. 그는 자신과 경쟁해야 할 상대의 노래에 대한 진심과 애정을 표현한 후 자신도 잘해보겠다고 다짐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잔인한 경쟁을 하게 한 심사위원을 패배자로 만들겠다고 다. 당돌다. 보란 듯이 음지에 묻어 둔 감정을  당당하게 꺼내 든 그의 말은 비록 경연 구조가 그렇게 돌아갈지라도  자신들은 경쟁이 아니라 함께 즐기는 자세로,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느끼고 격려하자는 메시지 느껴졌. 이후 그는 승패에 상관없이 음악을 즐기는 동료로 서로를 응원하고 있음을 느게 하는 무대를 만들어 갔다.

그는 공식 울보였다. 느낄 수 있었다. 방구석 루저로 내몰린 시절에 쌓인 그의 가슴속 응어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전장을 내밀겠다 다짐하고 참가했지만, 결국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상황에서 승자가 될지라도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복잡한 마음이  터져 나오는 거라고. 그의 눈물은 오랜 시간 패자의 마음으로, 비주류로 지내 온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아픔이고 공감이었을 거라고. 그가 부른 노래의 여정은 그 심리적 여정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그의 말이 곧 자신의 영혼이었음 무대를 통해 보여주었다.


너의 말이 나는 그냥 웃긴다. 퍽이나 위하는 척. 내 걱정해주는 척. 너의 걱정 따윈 필요 없으니 쓸데없는 참견 말고 갔던 길이나 가라고. 그 누구도 내게 간섭 말라고. 나만의 월드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나는 나만의 무대를 만들어 가겠다고.     

그가 부른 치티치티 뱅뱅은 그동안 내가 알던 노래가 아니었다. 그의 몸짓과 편곡은 노랫말을 온몸으로 전달했다.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자기 방식으로 승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의 몸짓은 낯설면서도 왠지 친숙했다. 우리 근원에 있는 어떤 정서를 건드렸다. 이효리의 쇼가 자본의 거품이 가득 낀 이 시대 히스테릭한 대중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느껴졌다면 이승윤의 편곡과 몸짓은 세상과 불화하며 방구석 루저로 내몰린 자의식 강한, 한 개인의 영혼을 내게 보여주었다. 흔한 기타조차 던져버린 채 거리의 부랑아로 , 온몸으로 온몸을 끌고 가보려는 몸짓. 그러나 초라하고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도 낱개로, 날것으로, 세상에 보란 듯이 제가 느껴 온 감정들을 솔직하게 쏟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런 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마음. 그래서 차라리 방구석에서 혼자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놀기로 작심한 듯한 그의 언어와 몸짓은 내 내면의 언어이자 세상에 대한 마음속 내 항변 같았다. 그러나 나는 드러내 말할 용기가 없었다.  애써  아닌 척했다. 세상의 상식에 적당히 맞추는 척했다. 가슴속에선  이 세계와 불화하는 감정의 조각들이 널뛰며 춤추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폭발적 반응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들의 반응이 내가 느끼는 지점과 같다면  아마도 우리는 애써 억누르고 있지만 객관적 상식이라는 세상의 잣대로 강요당하는 것들에 대해 개별 인간으로서 마음속 분노와 저항감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노래와 몸짓에 우리가 함께 반응하고 춤춘 게 아닐까. 내가 그를 통해 본 건 방구석 찌질이로 내몰린 이들의 가슴속 응어리였고, 그들이 꿈꾸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주단을 깔아 온 내 마음.  마음의 주단을 깔고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어 그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른다고.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고 싶다고.    

이후 그는 자신의 마음에 주단을 깐다. 세계에 대한 부정과 분노의 감정 가운데 자신의 에고라 여겨진 것들을 거두고, 빈 마음으로,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먼저 걸어 본 부정과 분노의 아픈 길을 지나 이제는 묵묵하게 자기 세계를 열어 갈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영혼을 지닌 이들의 마음에 날아가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을 먼저 위로한 후 자신과 같은 영혼을 노래와 시로 불러낸다.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사람이란 불. 사람이란 별로 가득한 세상.
각자의 방에서 우린 그 자체로 빛나자고.     

이어 부른 ‘소우주’ 가사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움직이는 방탄소년단보다 무명가수였던 이승윤 개인에게 더 어울리는 노래였다. 그는 노랫말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깊은 밤 혼자 노래해 온 별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를 썼다. 애매한 가수로, 경계인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여기면서도 꿋꿋하게 자기만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그는 장르가 이승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무대와 서사를 그려냈다. 오직 존재 자체가 지닌 빛깔과 개성으로. 그는 먼저 자신이 한 사람의 빛나는 별임을 증명했다. 물론  이 일을 그가 혼자서 다한 건  아니다. 그의 모습이  빛날 수 있었던 건 그의 가슴에 공명한 이들의 응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상호작용이다. 그에게 감응한 이들은 그를 통해 자기 존재 자체로 한 사람의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음을, 그 가능성을 확인했으리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가짜 꿈'
야 거기 망치질 좀 그만해봐/ 못이 튀어나와야 액자를 걸지
어서 와 우리의 무덤이야/ 어서 와 우리의 요람이야
박해받은 바람들이/ 바닥 아래 모여 카타콤에 유배됐어
이 지하가 내 비행의 마지막 고도 일지/ 가짜 꿈에 유배된 건 아니겠지
홀린 듯이 떠들어 우리가 여기 있어......
이제 우리가 나갈 차례야


그가 편곡해 부른 노래의 여정은 창세기 1장 2절을 떠올리다. 세기의  구절을 우리는 혼돈 속에서  에고의 죽음을  맞고 새롭게 태어난  개인의 심리적 여정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의 노래  '가짜 꿈'은 이미 그가 이 여정을 밟아왔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는  은유와 상징을 꽤 잘 쓸 줄 아는 음유시인이다. 그는 싱어 게인에서 다른 이들의 노래를 빌어 와 자신의 여정을 그려 냈고, 자신의 창조 신화를 완성했다. 그는 신화가 이야기하는 기적과 진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음을 자신의 서사로 증명했다. 혼돈과 공허 속에서 방황하며 치티치티 뱅뱅을 부르던 한 영혼이 깊은 어둠 속에서 에고의 죽음을 맞고, 빈 마음으로 태어나 마음에 주단을 깔고 시를 노래한 후,  이 세계와 따뜻한 화해를 시작하며 우리 각자가 각자의 별로 빛나자고 주문을 걸었다. 나는 그의 주문에 흔쾌히 응하기로 . 나 역시 용기를 내 나만의 서사를 이제 막 그려가 보려던 중이었다고. 


그는 이제 작은 영웅이 되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노래 ‘영웅 수집가’ 가사처럼 대중에 의한 소모품이 되지 않기를 바란. 그래서 그가 ‘새벽이 빌려 준 마음’을 오래도록 쥘 수 있기를.  그의 노랫말처럼 사람이 된 신이 오래도록 사람과 함께 울 수 있기를 응원한다. 


덧붙여 음악이 좋아 오랜 세월 무명가수로 살아온 이들이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고통의 무게와 그것을 견디고 정화하며 피워 온 진실한 마음 값들이 싱어 게인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져 왔음도 고백한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 값을 어떻게 저울질할 수 있을까? 마음이 피워 올린 노래들을 함께 아름답게 바라보는 데에만 더 집중할 수 있는 방식을 상상하며 그들 모두로부터 나는 나만의 작은 창조신화 여정을 펼칠 용기를 얻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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