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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Feb 26. 2021

'소비의 사회'로 '버닝'을 읽다 2

소비사회- 사물이 된 인간 헛간을 태우다.

소비사회 - 사물이 된 인간이 헛간을 태우다


쟝 보들리야르는 말한다. 산업 시대가 권장한 근면과 검소는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되는 미덕이 아니라고.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오히려 욕구를 향유하는 것이라고.  실제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물건을 산다고 믿지만 사실은 유행에 뒤지지 않기 위해 소비하고, 남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소비고, 공허를 채우기 위해 소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덕분에 이제 우리는 예전에는  누구나 누렸던 신선한 물과 공기마저도 빼앗버렸다. 세상의 한편은 점점 공해와 쓰레기 제국이 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자신을 사 줄 무엇을 찾아 자기를 제물로 바친다. 이제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일하고, 소비하기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물이 인간을 집어삼킨  오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폼나게 사는 것만이 우리 대부분의 인생 목표가 되어 버렸다. 가치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뒷방 이야기일 뿐이다. 그는 우리들의 이러한 욕구는 사물에 대한 필요의 욕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차이에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욕구는 조작된다. 소비의 사회는 생산이 수요를 좌우하는 단계를 넘어 소비가 넘볼 수 없는 것들도 사물로 만들어 소비하게 한다. 소비의 사회는 예술과 종교도 하나의 소비재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현실을 잊고 도피하기 위해 위안이 될 것들로 그것들을 소비한다. 인간 관계도, 타인을 위한 배려에도, 사회의 도덕률에도 소비사회의 조장이 숨어 들어간다. 개성 역시도 여러 유형의 모델 가운데 선택된 기호체계로서의 양상을 띤다. 차이에의 욕구는 절망적인 진실을 낳고 있지만 우리는 애써 외면한다. 성장의 질서 속에 살아왔듯 소비의 질서 속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이미 사물의 지배를 받는 물상화된 존재가 된다.


 종수는 사라진 여자 친구 혜미를 찾기 위해 벤을 추적한다. 그는 벤의 일상을 따라간다. 아름다운 송가가 울려 퍼지는 교회에서 본 사람들의 경건한 기도, 용산 참사의 비극을 담고 있는 캔버스들이 걸린 대형 갤러리, 고급 레스토랑에 함께 모인 풍성하고 화목해 보이는 벤의 가족, 그곳은 보들리야르가 말한 욕구 체계의 맨 꼭대기층의 상징적 모습을 보여준다. 소비사회에서는 예술도 종교도 사람의 관계마저도 소비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은 키치일 뿐 실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곳은 모두가 부러워하며 기꺼이 자신제물 바치고 싶어 하는 현장이다.

 

벤의 화목해 보이는 가정과 종수의 뿔뿔이 흩어져 해체된 가정, 무엇이 차이의 원인인가?

종수는 16년 만에 엄마를 만난다. 종수는 어떤 만남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보험설계사로 살아가는 엄마는 아들에게 500만 원이 필요하다는 얘길 별생각 없이 한다. 그냥 머릿속 생각을 뱉은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 종수는 자신이 그 돈을 해주겠다고 한다. 엄마를 바라보는 종수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외로워 보인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앉아 있으면서도 핸드폰 속 대상과 끝없이 카톡을 하는 그녀에겐 아들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아 보인다.     


종수의 고향 친구 혜미. 그녀의 집은 서울 남산 타워가 바라다 보이는 비좁은 원룸이다. 그곳은 하루에 딱 한 번만 햇빛이 드는 공간이다. 길거리에서 가게 홍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그녀는 성형을 하기도 하고, 취미로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는 팬터마임도 배운다. 카드 빚을 내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녀는 아프리카 부시맨의 이야기라며 종수에게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이야기한다. 리틀 헝거는 단순히 배가 고픈 것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아 목마른 자라 한다. 그녀는 자신을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로 여기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개성 또한 욕구 체계의 기호화된 어떤 유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믿지만 그녀의 삶이 진정으로 자유로운지는 의문이다.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혜미는 그곳에서 만난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종수는 설레는 맘으로 혜미를 기다렸지만 혜미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한다. 어쩌면 자기감정에 대한 확신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벤 앞에 자신의 존재가 너무 초라하게 여겨져 혜미에게 자기 마음을 드러낼 수조차 없었는지 모른다. 벤에게 혜미는 새로운 호기심거리로 잠깐의 유희일뿐이겠지만 혜미는 기꺼이 그 유희의 대상이  것처럼 보인다. 벤은 종수와 혜미에게 파스타 요리를 제공한다. 그는 요리를 즐긴다. 마치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요리를 정성껏 만들고 그것을 다시 자신이 먹는 쾌감을 자신은 즐긴다고 말한다.  이것은 메타포라고 하면서. 과연 어떤 메타포였을까?

신께 제물을 바치는 거대한 의식이 치러지지만, 오직 자신을 위한 먹잇감으로 존재하는 신.


이어 그는 종수에게 자신은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찾아 태운다고 한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쾌감을 얻기 위해서. 그는 자신은 눈물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삶의 의미에 목마른 그레이트 헝거를 이야기하며 우는 혜미의 눈물을 신기해한다. 어쩌면 그 점이 그가 종수와 혜미를 호기심을 갖고 만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에선 찾을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꿈틀거림.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는 무엇을 의미할까?


종수는  혜미가 사라진 것에 대해 벤을 의심하며 벤이 자신의 쾌감을 위해 혜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혜미가 벤의 비닐하우스였던 것이라 믿게 된 종수는 이제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야기 속에서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고 종수는 벤그의 차 포르셰 태웠다. 그러나 종수가 죽인 벤이 정말 혜미를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벤은 종수에게 혜미는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다. 이야기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종수가 그를 죽인 것이 실제인지 그가 혜미의 방에서 쓴 소설 인지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것이 종수의 소설 속 장면이건 영화 속 현실이건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소비의 하얀 미사를 때려 부수고자 한, 비현실적 존재의 허상을 태우고자 한, 그렇게 그레이트 헝거가 된 종수의 모습이다. 그가슴속 꿈틀거림. 그의 분노 느껴졌다는 점이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가슴속 깊이 잠자고 있었던 자신무의식을 직접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겨울 텅 빈 들판에서 발가벗고 서서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이 일을 행한다.  그렇다면 종수의 분노는 무엇을 향하고 있었을까?


 혜미는 우물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린 날 종수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기억, 그러나 종수에겐 없는 기억이다. 종수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물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보려 하지만 아무도 우물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우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혜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 것일 뿐. 특이한 점은 어릴 적 집을 나간 종수의 엄마만이 혜미처럼 그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엄마가 기억하는 우물은 혜미의 기억과 전혀 다른, 바닥이 드러난 메마른 우물이다. 왜일까? 우물은 종수가 엄마에게 기대해보려 했던 '사랑'에 대한 은유였을까? 어린 날 집을 나가버린 엄마, 그는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16년 만에 만난 엄마는 자신이 그리워하고 사랑한 대상이 아니었다. 종수의 환상은 무참히 깨졌다. 그렇기에 이제 종수에게 엄마는 메마른 우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혜미는 그에게 다시 사랑의 감정을 품을 수 있는 희망, 종수가 생각하는 구원의 대상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혜미가 종수를 그렇게 기억했던 것처럼 종수에겐 이제 혜미의 기억만이 살아있다. 종수는 혜미와의 관계 경험을 통해 서서히 변해갔다. 그는 이제 자기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려 한다. 그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었다. 혜미는 이 세계에서 무력하게 사라져 갔지만 종수는 혜미를 통해, 비록 그것이 찰나의 환상이었을지라도 사랑의 감정을 알았고, 느꼈고, 의미를 찾는 존재가 되어 꿈꿔 온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고지식하기만 해보인 아버지, 그러나 이제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분노를 이해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적어도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소설을 쓴다. 자신이 본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혜미는 종수에게 마임을 가르쳤다.


 "마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여기 네가 상상한 그것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다는 것을 잊어야  해. "


소설은 허구지만 소설이 허구라는 사실을 잊을 때 비로소 그 소설 속 이야기는 진실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것이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윌리엄 포크너의 동명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한 영화 안에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종수는 벤에게 자신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한다고 한다. 감독의 영화는 하루키의 소설을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그가 전한 메시지는 분명 윌리엄 포크 너 적이다. 하루키의 소설과 포크너의 소설은 벤과 종수의 이미지를 각각 닮고 있다. 두 소설을 한 영화에 담고 둘을 비교 대조하며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키치적 예술과 진짜 예술. 우리는 그 차이 이야기할 수 있을?

혜미는 종수에게 잠깐이지만 ‘사랑’이 뭔지 느끼게 했던 존재다. 비록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존재였지만 그러나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고 자기의 이야기를 믿고 자신만의 춤을 추려했던 존재이기도 했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지라도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알고 있는 존재로서의 혜미는 종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허상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종수의 삶을 변화시킨 존재였다. 우리가 품어야 할 가치가, 거기 숨 쉬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고. 나는 영화를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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