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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Feb 26. 2021

‘소비의 사회’로 ‘버닝’을 읽다 1.  

쟝 보들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이야기  

        

시대의 우울  

   

경제 기적을 이룬 풍요로운 사회라고들 한다. 그러나 에겐 그저 먼 나라 신화일 뿐이. 바깥세상은 모든 게 넘쳐 나는  화려해 보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풍요 보인. 내겐 골방에 무기력과 우울 속에서  신음하고  자책하 사람들의 모습이 더 쉽게 그려진다


  영화 ‘버닝’의 감독 이창동의 말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다. 국가, 종교, 계급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각각의 이유로 분노한다. 특히 젊은이들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무력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대의 문제는 세상이 뭔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자신들이 분노해야 할 대상과 분노의 원인을 분명히 밝힐 수 없다는 데 있는 듯하다. 젊은이들은 세계는 점점 더 세련되고 편리해져 가는데 정작 자신들에겐 미래가 없다고 느낀다. 그런 젊은이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로 보이지 않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만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도 답을 알길 없는 사회. 근본 원인은 모른 채 무작정 산발적으로 사회 이곳저곳에 분노를 투사하지만 분노의 과잉 분출일 , 출구 없는 미궁에 빠져 버린 듯한 현실. 심지어 그 분노조차 순식간에 상품으로 포장되어 버리는 사회.

영화를 보는 동안, 읽고 있던 책 쟝보들리아르의 ‘소비의 사회’가 오버랩되어 펼쳐졌다. 감독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소비의 사회’가 제시한 이 세계의 우울한 전망이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소비 시대의 문제들을 지적고 그 신화 속에 숨은 구조를 드러낸다.


“중세사회가 신과 악마 위에 균형을 유지하였듯이 우리들의 사회는 소비와 그 고발 위에서 균형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악마의 주위엔 이단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주술은 더 이상 이단이 존재할 수도 없다. 소비 사회의 주술은 자기 이외의 어떤 신화도 가지지 않는 그저 사회의 예방적인 으로만 작동한다. "     

우울한 전망이다. 그러나 그는 이어 말한다.


  "이제 우리는 사물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사물의 배후에는 텅 빈 인간관계가 있고 엄청난 규모로 동원된 생산력과 사회적 힘이 보인다고. 어느 날 갑자기 난폭한 폭발과 붕괴의 과정이 시작되어  확실한 방식으로 이 소비의 하얀 미사를 때려 부수기를 기다려보자"라.


그가 말한 ‘소비의 하얀 미사’는 무엇일까?

그리고 영화의 제목인 '버닝(the burning)', 곧 '헛간을 태운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성장의 그늘 - 양극화 시대


 ‘소비 사회’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의 문제 인식과 암울한 전망을 담은 글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암울한 미래를 보게 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발달은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대량 생산은 우리를 물질의 풍요로 이끌어 주는 듯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산업시대의 일꾼으로 그들의 근면과 성실은 물질의 풍요를 낳고 경제 기적의 신화를 낳았다. 그들은 단기간에 남아 돌만큼 많은 것을 생산했고, 그들의 성장 욕망은 지금도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멈출 줄 모른 채 계속 엔진을 돌린다. 세계는 엄청난 생산력 창고가 되었그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기적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 덕분에 넘쳐난 생산물을 맘껏 누릴 수 있는 풍요의 낙원에 살고 있을까?  


성장의 낙수효과로 인해 세계의 빈곤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성장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빈곤을 낳고 빈곤을 조장한다. 경제성장은 그 목적을 악마적으로 역전시켜 사회적 불평등을 낳고 특권계급을 유지시키며 사회의 불균형을 생산하고 부활시키고 있다. 성장할수록 차이의 간극은 점점 커진다. 생산의 증가가 재분배를 대신한다고 말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사회적 재분배를 제대로 경험해 본 적도 없다. 설령 재분배가 이뤄진다 해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의 문맥에서는 진실이 아니다. 부의 절대량이 얼만지 간에 그것은 체계적 불평등을 포함하면서 안정되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차원에서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계는 차이와 불균형을 모든 수준에서 합리화하고 보편화하면서 극한에 도달했다. 성장은 더 이상 풍부함이 아니다. 성장 자체가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장이 낳은 질서가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버닝’ 속에는 두 개의 공간이 나온다. 주인공 종수가 사는 공간과 그가 알게 된 개츠비 같은 남자 벤의 공간이다. 주인공 종수의 공간은 파주 시골집으로 햇빛도 잘 들지 않은 음침하고 칙칙한 곳이다. 잡동사니들이 쓰레기처럼 집안과 창고 가득 널브러져 있다.

그는 그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북한 방송과 종일 들려오는 티브이 뉴스의 소음 더미 속에 산. 그가 가진 차란 늘 흙 묻어 더럽혀진 아버지의 낡은 트럭 한 대가 전부다.

 반면 우연히 만난 고향 친구 혜미를 통해 알게 된 벤의 삶은 종수의 공간과 대극을 이룬다. 화려하고 세련된 강남 반포의 고급 빌라, 그 공간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하게 세팅된, 넓고 깨끗하며 조용한 공간이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종수의 눈에는 그의 삶 전체가 수수께끼다. 딱히 하는 일도 없어 보이는 그가 그런 공간에 혼자 살면서 일을 놀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니. 작가를 꿈꾸지만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종수에겐 비현실적으로 비치는 벤의 공간은 너무나도 동떨어진 삶의 세계이다. 생존을 위한 아르바이트조차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종수. 종수에겐 모든 게 수수께끼다. 도대체 같은 하늘 아래 이토록 다른 삶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종수의 아버지는 중동에서 벌어온 돈으로 강남땅에 투자하라고 권한 세상 물정에 빠른 변호사 친구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돈으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와 우직하게 소를 키웠다. 그러나 FTA 물결 속에서 망하고 만다. 소처럼 우직하고 성실했던 그의 삶이 한순간에 모두 도둑질당한다. 아내도 집을 나가고 가정도 해체된다. 그러나 누가 그의 삶을 도둑질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의 한은 순간순간, 예측할 수 없는 분노로 표출될 뿐이다. 왜인지 모르나 공무원에게 의자를 휘둘렀다는 이유로 공무집행 방해죄로 고소당해 법정에 구속되지만 그는 당사자와 타협을 권하는 친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다. 어쩌면 그것은 기만당한 종수 아버지의 삶이 나은 풀길 없는 저항이었는지 모른다. 종수 눈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답답하고 미련스럽게만 보인다.


경제 성장은 이렇듯 왜곡을 낳는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은총을 받고 누군가는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지지만 거기 어떤 정직한 율법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길 없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고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지만 도둑질한 대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똥만 보일 뿐, 싸 놓은 고양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혜미의 고양이 보일이, 여행을 떠난 여자 친구 혜미의 부탁으로 종수는 고양이의 밥을 챙겨주려 하지만 고양이는 아무리 불러도 종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가 그 집에 있다는 사실은 오직 고양이의  통해서만 증명될 뿐이다. 그리고 혜미가 사라진 후, 종수는 벤의 집에서 처음 고양이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미의 부탁으로 자신이 밥을 준 혜미의 고양이인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의 삶을 도둑질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그로 인해 고통을 겪은 아버지의 인생처럼,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벤의 부유한 공간처럼, 고양이는 그 모습을 정확히 드러내진 않은 채, 벤의 집에선 고양이로, 종수에겐 똥으로, 그 존재를 암시할 뿐이다.


벤의 깔끔한 집과 종수의 쓰레기 더미 같은 집은 대극이 한 쌍을 이루며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양극화 세계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이 세계에서 죄인은 율법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모자란 종수 아버지다. 도둑질당한 그의 삶은 도대체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할까? 제도와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런 물음조차 이미 식상한 사회인 듯하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가? 


이천 년 전, 주객이 전도된 사회에 던진 예수의 물음은 지금 이 세계에도 절실한 물음이지만, 이젠 그마저도'소비의 하얀 미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하얀 미사는 부디 착하게 평화롭게, 신에게도, 이 세계에도 잘 순종하라고. 그것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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