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생존기
(1)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로운 저녁. 열음은 지온과 함께 샤워를 마친 후 뽀송한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뛰어놀던 지온은 일찌감치 잠에 빠져들었고, 열음은 그런 지온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는 잘 때 가장 예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얼굴로 곤히 잠든 지온을 보면 열음도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카톡'
아차차. 무음 모드로 변경해 둔다는 것이 깜빡했나 보다. 열음은 지온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을 열었다. 핫딜이란 핫딜은 다 꿰고 있는 친구의 카톡이었다. 오늘의 종목은 티니핑 마스크였다.
마침 필요하던 건데 잘됐다. 열음은 곧바로 링크를 눌러 단숨에 결제까지 마쳤다. A형, B형, 독감이 종류별로 들이닥치는 요즘에 마스크는 필수품이었다. 전례 없는 독감 유행 앞에서 예방접종도 무용지물인 상황. 열음은 지온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타민이며 면역 프로폴리스며 닥치는 대로 먹이는 중이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바이러스. 지온을 키우면서 난생처음 들은 바이러스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데노, 파라, 라이노, 독감… 하긴, 바이러스가 아니어도 미세먼지 때문에 일 년에 절반은 마스크를 껴야 했다. 이제는 마스크 없는 세상을 기대하는 것도 요원한 일인가 싶었다. 휴대폰 화면을 끈 열음은 지온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열음은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평소처럼 잠에 허덕이는 훈을 깨웠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징징거리는 지온을 어르고 달래 등원시켰다. 그런데 청소를 마친 열음이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때우려던 그때 아이노트에 어린이집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공지사항>
[안녕하십니까, 사랑 어린이집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금일 믿음반 담임 선생님께서 A형 독감 판정을 받으셔서 안내드립니다. 추후 독감 증상 발생 및 확진 안내를 받으실 경우 원으로 연락 바랍니다.
아울러, 본 원은 매일 아침 소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염병 관리에 더욱더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곧이어 울린 전화. 지온이가 열이 난다는 연락이었다. 밥상도 물리고 달려가 지온을 만난 열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열이니 잠깐 흥분해서 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독감이면 안되는데... 당장 내일도 회사를 나가야 하는 데다 갑자기 연차를 쓸 수도 없는 상황인 열음은 난감해졌다. 남편은 연차를 쓸 수 있으려나? 천식에 고혈압에 당뇨까지 있는 엄마를 오시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강원도 산골에 사는 시부모님은 더욱 어려웠다. 이를 어째야 하나. 당장 아이 걱정보다 누가 아이를 봐야 하나를 걱정해야 한다니. 열음은 입이 썼다.
혹시 몰라 곧바로 지온을 하원시킨 열음은 소아과로 향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소망 소아과는 아이들과 보호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늘도 대부분 현장 접수 마감.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병원예약 어플로 미리 예약을 해둘걸. 3 진료실 의사는 유난히 차가워서 꺼려지는 의사였지만, 예약도 없이 찾은 병원에서 가장 빨리 진료를 보려면 방법이 없었다.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의사일수록 진료대기 시간이 길거나 아예 접수 자체가 조기 마감이었다. 그에 반해 3 진료실은 대기가 거의 없었다. 어차피 검사만 하러 온 건데 무슨 상관이야, 열음은 3 진료실 앞으로 접수했다.
“오늘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이 A형 독감 판정을 받으셨대요. 애기도 열이 나서.”
의사는 미열이니 일단 지켜보자며 검사조차 해주지 않았다. 다른 증상도 없는데 일단 집에 가시라는 말에 열음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독감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자지 않겠다며 떼쓰는 지온을 어르고 달래 겨우 재운 열음은 그제야 밥을 한 술 떴다. 허겁지겁 먹어치운 뒤 설거지를 하려는 순간 아이노트에 두 번째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이번엔 같은 반 친구 두 명이 독감 판정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열음은 훈에게 연락해 연차를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훈이 연차를 쓰기 위해 오늘 미리 야근을 당겨서 하기로 했고, 열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금요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다. 금요일에 주말까지, 총 3일 집에서 데리고 있으면 독감도 좀 사그라들겠지. 계산을 마친 열음은 이내 자신의 처지가 가엾게 느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아이가 아플지도 모르는데 회사 걱정을 먼저 해야 하고. 아닌가, 이게 당연한 건가. 다들 이렇게 사나? 이런 생각일랑 해본들 뭐에 쓴다고. 열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빨래통을 집어 들었다.
(3)
“어이구~ 아가씨 잘 잤어요?”
얼마나 달콤하게 낮잠을 잔 건지 지온의 볼이 발그레했다.
지온을 포근히 안은 열음은 이상하게 따뜻한 체온에 지온을 떼어내고 체온계를 찾았다. 아, 이 불안이 현실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분명 방금까지 괜찮았는데. 삑삑, 소리와 함께 체온을 확인한 열음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39.4도였다.
세 시간 만에 다시 찾은 소아과엔 이번엔 사람이 두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대기실 의자는 이미 다 찬 지 오래고 복도에도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금 제일 빠른 원장님은 5 진료실 원장님이구요, 1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하세요.”
“애기가 열이 많이 나서요. 30분 전에 39.4도였는데 해열제 먹여도 안 내려가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다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진료부터 보셔야 되세요. 접수해드려요?”
4월 초. 아직은 날씨가 추웠다. 그런데도 열음은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한 시간 반쯤 흘렀을까. 간호사가 지온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님, 폐 소리가 별로 안 좋은데요? 우선 엑스레이부터 찍어보시죠.”
열음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제발, 폐렴만은 피해 갔으면. 제발. 제발. 제발.
그런데 20분을 기다려 들어간 방사선실에서, 엑스레이가 무서웠는지 몸부림치던 지온이 왈칵 토를 하고 말았다. 어려 보이는 방사선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열음도 얼어붙었다.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열음은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물티슈로 토사물을 닦기 시작했다. 아이는 기가 넘어가게 울고, 토사물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열음은 그 순간 정말이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아니길 그렇게 빌었건만. 검사 결과는 A형 독감에 폐렴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진행이 이렇게까지 빠를 수가 있나. 그냥 아까 독감 검사 해줬으면 좋았잖아. 열음은 하지도 못할 말들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며 페라미플루를 맞히는 데에 동의했다. 5일 동안 먹어야 하는 독감 약을 단 한 시간, 수액 한 번에 때려 넣는다고 했다. 연차도 눈치 보며 써야 하는 직장인 주제에 뭘 가리겠는가. 열음은 고민 없이 링거를 택했다.
지온은 독감 코를 쑤시는 독감 검사에 이미 한번 기가 넘어가게 운 뒤였다. 주사 바늘을 보고 얌전히 팔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나 싶게 몸부림을 치는 지온 때문인지, 아니면 간호사의 실력 때문인지, 시퍼런 멍자국을 세 개나 만들고 나서야 링거를 맞힐 수 있었다. 지쳐서 잠들어버린 지온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니 그제야 열음 눈에 주변이 들어왔다. 도떼기시장처럼 저마다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있는 아이들과 지친 기색으로 그 옆을 지키는 엄마들. 열음은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 뿐이었다.
주사액은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지온의 팔에 꽂힌 바늘을 타고 들어갔다. 너무 빠르게 맞아 그런가, 주사 바늘을 뺀 지온의 팔이 퉁퉁 부어있었다. 열음은 혈관을 못 찾아 지온의 팔을 두 군데나 멍들인 간호사에게 괘씸죄까지 얹어 한소리 하려다 그만두었다. 간호사 탓만을 하기엔 지온의 반항이 제법 거셌던 탓이었다. 간호사도 참 못할 짓이다. 열음은 외려 딱한 마음까지 들었다.
(4)
열음이 지온을 데리고 병원을 나섰을 땐 이미 저녁 8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온몸에 힘이 없는 열음이었지만, 지칠 대로 지쳐 잠든 아이를 이고 지고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났다. 훈이었다. 열음은 지온을 안고 선 채로 엉엉 울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지온을 눕히고 나온 열음은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거실을 정리하던 훈이 열음을 짠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울고 나니까 좀 나아?”
“응. 자기 근데 마스크 써야 하지 않을까? 우리까지 걸리면 더 힘들어지잖아.”
“의미 있나? 오늘 아침에도 뽀뽀했는데 뭐. 걸리면 회사 안 가고 좋지 뭐.”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피해 갈 수 있으면 피해 가야지 애 아픈데 자기까지 아프면 나보고 둘 다 수발들라는 거야?”
“결국 그게 걱정인 거구만? 알겠다, 알겠어.”
표 나게 쿵쾅대며 마스크를 쓰는 훈을 흘겨보던 열음은 체온계를 들고 조용히 지온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좀 내렸으려나, 하며 지온의 이마를 짚은 열음은 깜짝 놀랐다. 여전히 이마가 불덩이였다.
지온은 밤새 39.9도에서 38.7도를 오가며 고열에 시달렸다. 한숨도 못 자고 열 보초를 선 열음이 퀭한 눈으로 거실에 나왔을 때, 볼이 발그레해진 훈이 약을 찾고 있었다.
“나도 독감인가 봐.”
아. 저 새끼 진짜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