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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Feb 05. 2024

보이는 데에 여권 꺼내 놔

12시간의 강행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오늘 어땠냐?'고 물으니

'보이는 데에 여권 꺼내 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철렁 내려가는 마음.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뭐야. 나랑 우리 아이들 두고 떠난다고?'라며 장난으로 받아쳤지만 밥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누워 버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미안함과 불안함이 뒤섞여 버렸다.


남편이 한국에 와서 19년을 일하며 여러 일을 했지만 공장 일은 12시간 근무 중, 점심시간과 휴게시간이 보장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식당은 그렇지 않았다. 계속 서서 설거지를 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즉각적인 대응을 해야 하고. 아무리 한국어가 능통해도 현장에서 오가는 용어는 낯설고, 일도 낯설었을 것이다.


그리고 출퇴근의 개념이 없는 남편이다. 기숙사생활을 하며 걸어서 5분 이내의 작업장으로 가서 일하고 다시 돌아오던 그가 왕복 2시간 가까운 시간을 매일 운전해야 하는 이 상황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알면서도 함께 고민하여 선택한 일인데 저런 대답을 들으니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아버렸다.


아이들은 아빠가 정한 9시에 공부하기 위해 미리 저녁을 먹고, 평소엔 아무리 잔소리해도 잘 씻지도 않더니 자발적으로 씻기도 한다. 그런 변화에 나는 기쁘지만 남편의 말한마디가 뒤통수에 달라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빨래를 널며 남편의 말을 곱씹다가 '내가 더 힘을 내야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식당 일을 하며 몇 달을 앓았다. 마침 위통이 생겨 몇 달을 고생했고,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한 달 가까이 파스를 붙였었다. 매일 달라지는 포지션에 때론 화가 났고, 연말에 퇴사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 적도 있다. 그런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남편과 함께 식당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어떤 꿈을 꾸면 좋을지. 생각을 바꿔가고 있는데 남편의 말 한마디에 벌써부터 낙담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고 부모 생각 나는 건 당연지사다. 이미 타국에서 19년을 산 그에게 낯선 환경, 낯선 일이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까. 그러니 내가 좀 더 사랑하고, 품어주고, 이해해주어야지. 그게 부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니 불안했던 마음도 사그라드는 것 같다.


나마저 휘둘려 버리면 어떻게 하겠냐. 좀 더 이를 악물어야지. 오늘 하루 너무 수고 많은 남편. 마음도 몸도 모든 게 힘든 하루를 잘 견뎌 주어 고마워. 내일 우리 또 힘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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