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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20. 2022

[주간단남] 6월 3주 차 아침 생각

22.06.12(일) - 22.06.18(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6.12 (일)


(..)

나만의 기준이 확고하다. 그게 때로 가까운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들이댄 내 기준들은 설령 나 자신조차도 100% 지키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내가 주변을, 그리고 나아가 스스로를 힘들게 만든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이기적이여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여서가 아닐까?




22.06.14 (화)


(..)

주간단남에 쓰인 글이 사람들이 보고 싶은 내용이 아니란 얘기다. 방법은?  내가 글을 더 잘 쓰면 될까?

아니다. 답은 그냥 내가 유명해지면 된다. 

(..)

현대인은, 적어도 SNS를 이용하여 각종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바쁘기 그지없다. 얼마나 바쁘냐 하면 스크린을 엄지로 쓱쓱 내려가며 지나치는 콘텐츠 하나당 쓰는 시간은 아마 30초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관심사를 건드리는, 혹은 관심사는 아닌데 본능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뭔가가 나타날 때 비로소 1분 이상의 시간을 간신히 쏟곤 한다.

(..)

주간단남에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 건 전혀 이상할 것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란 뜻이다. 나였어도 똑같이 그러고 있을 테니까. 이것을 전복시키려면 방법은 하나다. 그것이 궁금하게끔 만드는 것. 그렇게 하는 길은 많다. 그중에 가장 간단(?) 하고 확실하며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길이 있다. 바로 말했다시피 내가 유명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달라지기 시작한다. 내가 매일 아침 목적 없이 뱉어낸 생각의 조각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하여 관심을 갖고, 심지어 몇몇은 필사도 하고 분석을 할 것이며, 어느 출판사에서는 같이 책을 써보자는 제의까지 들어올 것이다.

(..)

1년 가까이 쓴 만년필이 사망했다. 원인은 나의 관리 소홀과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열심히 시도한 청소. 나에게 피드까지 분리해서 깨끗이 청소하라고 했던 그는 누구인가! 괜스레 그를 원망하게 된다. 과정은 참 속이 다 시원하고 즐거웠으나 그로 인해 내 인생 첫 만년필을 잃었다. 평상시에 틈틈이 세척하며 열심히 관리하지 않은 나의 과오가 크다.

(..)

사람이 불행한 원인은 행위 자체를, 그리고 행위를 넘어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을 목적이 아닌 과정으로, 수단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

엔젤 넘버를 의식하고 나서부터는 괜히 더 든든하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면서 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그거 아나?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줄 때 적어도 나 자신은 그것을 안다. 내가 안다는 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위대한 것이다.





22.06.15 (수)


(..)

모든 저자는 탈고와 동시에 머리가 비워진다. 그때 쓴 글은 그때의 자시 자신이라는 육신을 통해 세상에 불어 넣은 신의 숨결이 머문 흔적이다. 나라는 존재를 필터로 삼아 통과해 나옴으로써 세상에 단 하나뿐이자, 일생에 단 한순간뿐일 그런 흔적이 남겨지는 것이다.

(..)

종종 옛날 어느 한순간을 기록한 사진 같은 것을 보면 묘하게 지금의 내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저절로 '그땐 그랬지.'라는 말이 나온다. 본신이라는 탑승자는 변하지 않았으나 육체는,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마음이, 에고는 조금씩은 그때와 달라져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고정된 존재가 아님을. 매 순간 변하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그런 고정된 기록물을 보면 더욱 여실히 느낄 수 있게 된다.

(..)

나는 예전부터 이 모닝 페이지 위에 진리를 좇는 구도자의 비전을 적어왔다. 요즘의 나는 이제는 마음의 영역을 넘어 몸의 영역까지 구도의 길을 확장시켰다. 올바르게 접근한 활쏘기는 몸으로 깨우치는 우주의 진리를 맛보게 해줄 것이요, 그것을 침뜸을 이용한 경락과 형의 실제를 배우고 느껴봄으로써 뒷받침하고 강화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중에는 태극권도 수련해 봐야지.




22.06.16 (목)


(..)

가능 불가능을 따져보는 습관은 저 뒤로 미뤄라. 그리고 무언가 재밌어 보인다면, 게다가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그냥 해보자!'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달려가서 곧장 시도해 보라.

(..)

정신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결국에는 하나의 뿌리에서 만난다. 자유라는 뿌리. 그 뿌리는 바로 해방을 말한다. 내면을 쥐고 흔들어 대는 에고라는 녀석으로부터의 해방.

(..)

그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서 불확실하고 답이 없는데도 그렇게 소신껏 자기의 입장을 밝힐 줄 아는 용기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무서워서 그런 시도를 망설이고 있나. 바로 틀린 사람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그리고 가장 큰 것은 언행일치가 되고 있지 못한 것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다.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명징한 시선을 유지하라며 자주 말하는 것에 비해 정작 나 자신은 스스로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에 떳떳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런 두려움이 작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떳떳함에 필요한 적정 수준이라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설정한 기준치가 너무나 높은 나머지 더욱 유보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22.06.17 (금)


(..)

'나는 어느 세월에 저렇게 하나?'라는 비합리적인 생각이 드는 것 까지는 내가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이내 알아차리고 그것을 스스로 교정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

과정만 중시해서도, 결과만 중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과정이냐 결과냐에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 몰입은 현재를 사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다.

(..)

몰입의 필요조건은 바로 온전히 현재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감사함을 느끼는 것. 그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보통의 상태를 뛰어넘는 특별한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나'라는 개념이 잠시 사라지고, 대상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

(..)

세상의 위대한 업적들은 하나 가이 다 몰입을 요구했다. 현재에 머무는 것은 몰입으로 가는 열쇠이고, 몰입은 위대한 업적으로 가는 관문이라면 결국 현재를 산다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쌓는 첫걸음이 된다. 

(..)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퍼즐 조각을 줍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각 배움의 과정은 그 퍼즐 조각들이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떤 큰 그림의 부분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누가 그린 그림인가? 바로 신이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 신은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




22.06.18 (토)


(..)

나는 알람을 일단 스스로 꺼버리고 다시 잠들어 버렸음을 깨달으면 그 특유의 태도가 발동된다. 하나라도 오점이 보이면 다 놓아버리려 하는 그 특유의 성미. 무결점의 상태를 지향하려다 보니 조금만 기준치에 미달하면 없던 일로 리셋 시켜 버리려고 하는. 흑백논리와 완벽주의의 화려한(?) 콜라보다.

(..)

과시든 자기만족이든 둘 다 뿌리는 같다. 타인의 존재에 대한 상정이 그것이다. 순수한 자기만족이란 없다. 

(..)

인간은 애초에 완벽히 홀로인 상황을 가정할 수가 없기에 100% 혼자만을 위한 자기만족 같은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만족이라 외쳐대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아 밖에 사람들이 보면 난리 나겠는데! 장난 아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어떤 작품 같은 것에 대해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 기준을 가져와 사용하고 있으면서 단지 그 방향이 타인에게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직 타인에게 뭔가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자기만족이라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기는 남에게 알아달라고 관심을 요구하고자 SNS 와 같이 오픈된 공간에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님을 말하기 위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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