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의 글
연애 초반, 성호의 패션은 참으로 독특하고 다채로웠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를 외치는 나와는 정반대인 그의 화려한 패션 덕분에 데이트 때마다 원치 않던 눈호강을 많이도 했다.
성호가 즐겨하던 꽃무늬 넥타이, 어깨에만 회색 장미꽃이 20송이 그려진 맨투맨, 소매 아랫부분에만 꽃이 잔뜩 그려져 있어 평소엔 얌전하다가도 팔을 들 때면 겨드랑이 밑에 꽃밭이 만발하곤 했던 셔츠는 지금 떠올려도 눈이 어지럽다.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패션이었기에 내 기준엔 살짝 과하다고 생각돼서 슬쩍 말해보기도 했지만 자신의 패션감각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느 여름날에는 다 벗고 있는 아기 천사 둘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왔다. 심지어 그는 이것이 자신의 최애 티셔츠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제야 나의 힘으로는 성호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그의 패션 세계는 나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끈끈한 연으로 이어지다 못해 똘똘 뭉쳐있어 감히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용납할 수 없던 취향도 시간이 지나니 그러려니 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이 성호를 어느 정도 평범하게 만들어준 건지 내가 많이 내려놓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 생각해보니 후자다. 후자가 확실하다.
1년 전, 같이 수영을 배울 때에는 기본기를 마스터하더니 원래 입던 검정색 쫄쫄이 5부 수영복을 홀라당 벗어던지고는 새로운 수영복을 입고 왔다. 핫팬츠보다 짧은, 근데 이제 호랑이와 꽃 그림을 곁들인, 그런 수영복이었다. 아, 신이시여. 아직 멀었나이까. 저는 얼마나 참아야 하나요.
강사 선생님을 포함해 온 수영장을 통틀어서 성호의 수영복이 제일 짧다는 사실은 내 얼굴을 토마토처럼 빨갛게 물들였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민망해하는 이상한 그림이었다. 얼른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욱여넣기도 했지만 성호는 자신의 수영복이 자랑스럽다는 듯 실실 웃으며 물 밖에서 준비운동을 마쳤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사람도 아닌데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취향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딴지를 걸곤 했다. 어느 날도 평소처럼 열심히 딴지를 걸고 있는데 묵묵히 듣고 있던 성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어떤 옷을 입든, 어떤 머리를 하든, 상관없는데..”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성호는 나랑 6년을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외모와 패션에 태클을 건 적이 없다. 만약 성호가 이렇게 입어라 화장 좀 해라 머리를 좀 길러라 등의 충고를 했다면 나는 곧바로 이별을 감행했을 것이다. 지금껏 나는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바꾸려 했던 내로남불 끝판왕이었던 것이다. 나의 오만함을 당당하고도 당연하게 여기며 가장 가까운 성호에게 무례를 마음껏 휘둘렀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도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뭐라고 한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지속해줘서. 만약 성호가 나 때문에 자신의 취향을 접어두고 모든 걸 나에게 맞췄다면 나는 계속해서 오만방자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성호는 나 때문에 자신을 점점 잃어갔을 것이고, 그럼 나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절멸시킨 독재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이렇게 내 잘못을 깨우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휴, 그가 아주 단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독재자가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성호가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있는 힘껏 응원해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의 취향에 공감하진 못해도 바꾸려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주기로. 좋아하는 걸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도록. 그가 나에게 늘 그랬듯.
지금 성호의 핸드폰 케이스에는 꽃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입었던 바지에도 형형색색의 호랑이가 20마리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무섭게 생긴 호랑이도 자꾸 보니 정이 든다. 꽃과 호랑이를 사랑하는 그에게 호랑이 민화라도 하나 선물해야겠다. 좋아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