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의 글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끌어당겨 부딪히듯, 우리는 성격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인지 정말 많이 부딪혔다.(실제로 MBTI 성격 유형상으로도 각각 N형과 S형이다). 지금이나 연애 초나 서로 사는 곳이 멀지 않아 자주 붙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우린 거의 매일 만났기에 아마 붙어 있던 시간만 놓고 비교하면 10년 이상 사귄 커플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지지고 볶고 한끝에 우리가 도달한 한 가지 결론은 바로 상대를 바꾸려 하는 것이 모든 갈등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흔히 연애는 서로 맞춰가는 것이라고 한다. 맞다, 비단 연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그런 노력 없이는 장기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을 서로가 상대를 원하는 대로 바꿀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성격이나 행동을 고치라고 요구할 권리 같은 것은 없다.
민경이와 나는 상대가 가진 고유한 모양을 자신이 익숙한 대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깎아내서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하려고 했다. 상대방이 요구한 모양이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스스로의 모양을 깎는 고통을 견디는 ‘조각’과도 같은 것. 그것이 ‘서로 맞춰가는 연애’라고 믿었다. 우리는 싸우고 나서 화해를 할 때면 서로에게 ‘너의 이런 점은 나를 화나게 하니까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흡사 국제 외교 무대를 방불케 하는 협상의 장이 따로 없었다.
대부분의 커플이 이렇게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기보다 밖에서 찾는다. 그러다 보니 상대를 바꾸려고만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예전만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상대가 자신을 위해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것이라 단정 짓는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꺼내봤을 ‘연애 필수 어록’ 중 하나인 말을 내뱉는다.
“변했어.”
변화는 주체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한다. 상대가 나의 특정 언행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무의식적 습관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상대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다. 관계에 의무를 부여하는 순간, 찬란한 꽃과 같던 관계는 금세 시들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더욱 상대방이 ‘나를 위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상대방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모두가 독립적인 주체다. 결국 연애든 우정이든 사람 간의 모든 관계가 성숙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라이프 코치 ‘알렉스 룽구(Alex Lungu)’가 성숙한 연인 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애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라고. 흔히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연애라고 생각하지만(½+½=1), 실은 성숙하지 못한 두 사람이 만나면 오히려 연애를 하기 전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½*½=¼). 그는 성숙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상대를 부족하다 여기고 바꾸려고 하기 전에 각자의 부족한 점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단순 명쾌한 표현이 있을까?
미성숙한 관계, 행복보다는 불행을 만들어내는 관계는 행복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할 때 만들어진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어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연애를 하는 사람은 끝내 상대를 망치고 본인 스스로를 망친다. 상대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그러므로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만나도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행복의 파랑새는 내 안에 있다는 말처럼, 나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나 외부의 어떤 요인에 달려있지 않다.
나는 상대를 바꿀 수 없다. 상대도 나를 바꿀 수 없다. 이 간단한 명제를 우리 둘은 숱한 다툼 뒤에야 깨달았다. 깨달았다기보다는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여전히 서로의 단점에 신경이 유난히 거슬리는 날이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 상대를 이기고 말겠노라는 유치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직도 멀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깨달음을 되뇐다. 내가 또 상대를 바꾸려 했다는 것을.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싸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모르고 싸우는 것과 그것을 알고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전자는 스스로 감정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맞춰 스스로를 더 잘 바꾸는 사람을 찾아 끝없는 항해를 지속하거나, 연애 자체를 피곤한 것으로 인식한다. 반면, 후자는 감정의 원인을 상대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그 결과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또 상대를 바꾸려 했기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선을 안이 아닌 밖에 두는 것은 쉽다.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생기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외치거나 그 사람을 피해 자리를 떠나버리면 된다. 반면에, 시선을 안에 두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처음에는 내 감정의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았지만, 내면을 바라보면 ‘내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특정 행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감정의 원인이 내 안에 있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그런 사람들의 관계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내 탓이오’하며 자책하라는 뜻은 아니다. 파괴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따위의 망언을 내뱉는 상대와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