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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18. 2022

壬寅년 庚戌월 두 번째 기록

22.10.09(일) - 22.10.15(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0.11 (화)


(..)

2023 계묘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한 게 떠오른다. 부동산이 회복세에 접어들 것을 고려하여 현금을 마련해 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현금 보유와 관련해서는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다.


(..)

(중략) 그것이 유일한 방법.. 아니, 이런 프레임도 좀 바꿔야 한다. 유일한 방법이란 없다. 길은 다양하다. 유일한 방법이라는 표현을 구태여 쓰고 싶다면 반드시 앞에 '내가 아는'이라는 제한적인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

너무 많은 것을 다 알려주려고 하지는 말자. 직접 겪어보며 성장해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직접 부딪혀 보고 문제점에 대해서 해결책을 강구해 보고, 그 과정에서 의논할 대상이 필요할 때,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을 때, 그때가 나설 때다. 그래야만 모든 과정을 자신이 스스로 개척하고 적응해 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

진정 내 내면에서 나오는 제목은 무엇일까. 세간의 기준이나 세태에 떠밀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들이 무엇에 눈길을 줄지를 뻔히 알면서도 (정말 아는 것 맞아?) 애써 외면하지도 않은 그것. 


온전히 나만의 기준에 따라 무슨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바깥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그렇다고 그 기준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대척점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닐, 그 어딘가일 테다. 그것은 분명 제3의 기준이요, 동시에 전무후무한 기준이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22.10.12 (수)


(..)

어제는 뭔가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랄까? 그랬다. 오후에도 기도를 드려서였을까. 그렇게 단 시간에 뭔가가 될 일은 없고.. 이거! 이 생각! 이렇게 자신을 한계 짓는 관념을 잘 알아차려야 한다. 비범한 사람이 되려거든 비범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이 창조가 된다면, 평범한 사고는 평범한 현실을 만들 뿐이다. 


(..)

어제 컵 King 카드에 대해 배우는데 정말 나 같더라. 감정의 깊은 공유가 되지 않고,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바쁘고 예민한 사람. 그렇다 보니 감정에 깊이 빠져들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선생님은 오히려 이런 사람이 상담 쪽으로 가면 잘 맞는다고 하셨다. 거기에 휘말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

진도화에 해당하는 午火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 다 했지. 크리에이터로 살아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사주다. 다만 사판적인 측면에서 본인이 그런 자신감을 가져야만 가능하겠지. 유튜브.. 나도 내 인생에서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플랫폼이다. 언제가 내게 적시일까? 아마도 내게 火의 기운이 들어올 때가 아닐까? 火는 방송이나 연예의 물상이기도 하니까. 그전까지는 열심히 기를 모으자.


(..)

오늘은 여기까지만 쓸까? 하는 내면의 유혹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밀고 들어온다. 아냐, 타협하지 말자. 이런 사소한 곳이라고 해도 습관적인 타협으로 오염시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내 일상은 병들어 무너지고 말리라.  컵 King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물이 되어라. 다만 그 길은 쉽지 않으며 매 순간이 고난과 장애물의 연속일 것임을 각오하라.


(..)

마음이 악해지는 것을 늘 경계하고 내면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군자의 삶을 산다면, 삼형이 오든 무엇이 오든 그저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듯 흘러가 사라질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로 인해 흔들릴 수 있는 나의 마음이다.





22.10.13 (목)


(..)

말로 하나 남에게 털어놓나 둘 다 자기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는 같다. 그러니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땐 그것을 혼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해서 분출해 버리는 것이 가장 지속 가능하다. 듣는 이를 반드시 상정해야만 하겠다면, 듣는 행위가 그 자체로 에너지와 시간이 소진되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


(..)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이요, 나머지는 관객이라고 생각한다고 니체는 말했다. 잘 살펴보면 결국 누구나 남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백만 명의 사연을 진심을 다해 들어주는 일보다 백만 명의 관객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말하기 보다 듣기가 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타적인 행위다. 별도의 반응이나 맞장구 등이 결여된 듣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다는 아주 고마운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 듣기 행위에서의 모자란 부분을 지적하기에만 급급하다. 충분한 반응과 주의 집중이 자신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다.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과 언사야말로 자신을 위해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준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하는 셈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

무엇이 사람의 이기심을 증폭시키는가?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나누고 주려고 하기 보다 받으려고 하고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심지어는 남의 것을 빼앗아 오고 싶게끔 만드는가? 


그것은 상실에 대한,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겪어봐서 아는 것이든,  타고난 동물적 본능에 의한 것이든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한 개인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든다. 자기 코가 석자라 이거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 


무엇인가 올바른지 아닌지는 주관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 잠깐의 상상이면 그것에 대한 판단이 바로 설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좋을까? 적어도 별문제 없이 세상이 괜찮게 돌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물었을 때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양심과 '참나'의 대답이 그렇다고 나오는지를 보면 된다.


(..)

법과 같은 제도적 규약이 없어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옳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 줄 내면의 빛이 존재한다. 


(..)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외면하고 멋대로 사느냐, 그것을 따르느냐에 달려있을 뿐.


(..)

초심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사람으로 말하면 그것은 삶의 소명과도 같은 것이다. 살아갈 이유나 의미 혹은 목적이 되어주는 삶의 미션이 전무한 채 쾌락만을 좇으며 사는 삶은 텅 빈 껍데기와 같이 공허한 삶이다. 


(..)

종교가 상실해 버린 구도라는 가치는 철학이 이어받고 있다. 사색하는 사람, 진리에 대해 상정하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 끝없는 수행의 길을 걷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지금의 종교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내면을 보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남들을 이끌 자격이 없다. 지금 시대에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직 돈. 돈뿐이다. 이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가. 과거의 조상들이 나라 잃은 슬픔을 겪었다면, 작금의 현대인은 물질이라는 비구름에 도덕과 신의, 사랑과 나눔 등으로 대표되는 태양빛이 가려지는 슬픔을 겪고 있다.




22.10.14 (금)


(..)

해경 복무 시절, 나는 빽을 써서 보다 편안한 보직으로 배정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나는 그 대가로 제대 후 지금까지도 종종 기억이 나는(물론 미화가 많이 되어 그땐 그랬지~하는 수준이지만) 정도로 정말 '징했던' 맞선임 하나를 만났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정된 일에 개입하게 될 경우 그에 따른 반작용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는 것 말이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빽을 써서 이득을 보거나, 가만히 존재하기로 되어있는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하는 식의 순리에 어긋나는 행위는 모두 언젠가 어떤 방식이 되었든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

나의 성장을 위해서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경험이 일어나는 것뿐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타인으로부터 겪는 부정적 감정은, 그런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트리거가 되는 '타인'이라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내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인 셈이다.

(..)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들은 결국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측면들 중 하나인 것이다. 100인 100색이라는 말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속에서 그들과의 교류를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들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교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나 자신과의 끝없는 마주침이요 대화의 연속일 따름이다.

(..)

삶이란 나 자신을 알아가는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스스로와 마주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물론 그 방식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조용한 곳에 앉아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행위를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혹은 무리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의 다양성이 곧 삶의 다양성이다.

저마다의 삶의 목적이 있는듯해 보이나 그것들을 하나로 꿰는 큰 줄기는 결국 나를 알아가는 것. 사실 전체의 우주의 부분으로서의 우리 각자는 하나의 점에서 똑같이 출발한 존재들이다. 그 출발 지점을 인식하는 것, 그로부터 세상과 내가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얼마나 미묘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존재인지를 아는 것. 크게 보면 우린 그저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저마다 상이한 개개인의 삶의 목적을 이룬 결과의 끝에 놓인 마지막 관문이자 종착역이다. 

(..)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모닝 페이지를 쓰다 보면 나를 잠시 잊는 순간이 이따금씩 찾아오게 되는데, 그때 내 펜을 움직이는 것은 편협한 나의 에고, 그러니까 내가 자아라고 인식한 그 존재가 아닌 그 너머의 어떤 존재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몸이 바쁜 것과 세상 속에서 깨어있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이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고, 하루 종일 바쁘게 살면서도 잠들어 있을 수 있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어떤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언제나 깨어있음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자.



22.10.15 (토)


(..)

적당히 텐션을 풀어줘야 심신이 지치지 않는다. 심신에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지면 조급해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할 일을 찾아 하게 되리라.

(..)

그러니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며 두려운 마음을 갖기 보다는 내가 배운 것을 그대로 잘 활용하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떠올리자. 내가 초보라면 왕초보를 상대하면 되는 법.

(..)

1인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이토록 다양한 업무가 들어가는 것이구나.

(..)

역학을 베이스로 깐다는 것은 결국 내면을 살피는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역학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검증된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자를 비롯하여 내로라 하는 동서양의 많은 선현들이 주역을 닳도록 읽었던 것은 동양의 역학이 얼마나 심오하고도 방대하게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이쪽' 세상으로의 여정에 몸을 담그게 된 이상 나는 끝없는 공부의 길에 접어든 셈이다. 공부와 활인을 동시에 하는 삶. 어찌 아니 즐거울 수 있으며, 어찌 아니 뿌듯할 수 있겠는가!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삶이 내가 의도하고 바라는 대로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할 일은 그저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전에 그러한 세상의 이치에 대한 믿음을 지니는 것. 삶이 열어주는 길의 세부적인 양상이 설령 내 기대와는 다를 수 있어도 그 모든 것을 과정의 일부로 바라보며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 단지 그것 뿐이다.

다만 그것이 말이 쉽지 참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삶이란 그러한 어려움을 인정하고 극복해 나가는 여정에 다름 아닌 듯 하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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