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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10. 2022

壬寅년 庚戌월 첫 번째 기록

22.10.02(일) - 22.10.08(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0.04 (화)



(..)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것도 언제든지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주저 않아 다 포기해버릴 수도 있는, 어떠한 강제성도 없는 길 위에서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들었을까. 첫째는 고난이다. 스스로 해결책을 궁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그런 환경에서 자신의 '기존의' 장애물, 즉 알량한 자존심, 혹은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

걷는 행위란 자신의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낭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이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A에서 B로 이동하는 기능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동이라는 생물학적인 기능을 초월하는 행위다. 예수도 걸었고, 모세도 걸었고, 부처도 걸었다. 역사 속 다양한 인물들이 걷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각자만의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22.10.05 (수)


(..)

인간의 선한 마음은 내버려 두면 악한 부분이 와서 잠식해버리므로 끝없는 주의와 보살핌이 요구된다. 순수한 만큼 또 유약하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예민한 난초를 기르듯 자기 마음의 선한 부분을 헤아리고 살펴야 겨우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성악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내면은 악이 차지하기 더 쉬운 공간이라는 뜻일 뿐이다.


(..)

삶의 여정이 곧 구도의 길이요, 깨달음의 길이라면 각자에게 놓인 길의 형상은 저마다 상이할 테다. 각자가 지닌 트라우마, 발작 버튼, 방어기제 등의 각종 심리적 관념들. 비록 고통스럽지만 그것들을 한꺼풀씩 벗겨내는 정신적 탈피를 하는 것이 타고난 삶의 미션인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미션 수행을 위한 에너지를 얻는 충전소의 역할을 한다. 싫어하는 것은 내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직면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단순한 클리셰가 되지 않도록 하자. 그 말 역시 넓은 관점에서는 현존을 의미한다. 범사에,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 역시도 모두가 현존의 또 다른 얼굴에 다름 아니다. 


(..)

진정으로 어떤 행위를 할 때, 의식은 행동에 담기고 그때 그 행동에는 고유의 에너지가 담긴다. 의식적인 행위들이 상호 교류를 할 때 에너지는 서로 공명하여 훨씬 더 크고 강하게 그 기운을 발산한다. 모든 이가 현존하는 공간과 모두가 눈만 깨어있지 사실상 잠들거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무의식 상태인 곳은 이미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부터가 다르다.


(..)

자격증이라는 게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자신을,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스스로 한계 짓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자격증은 일정한 능력에 대한 결과일 따름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거꾸로 자격증이 있다고 능력이 보장되는 것 또한 아니다. 자격이 곧 목적인 세태에서는 목적의 달성은 곧 추구의 종료를 뜻하기 때문이다.


(..)

무리에서 이탈한 자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을 덜기 위한 자기 확신. 나는 부끄럽게도 예전의 내 모습과 비슷한 삶을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깔보며 내 삶에 대한 확신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우월감은 쓸 데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은 자신의 내면에서 구해야 한다. 


오늘도 그 답을 찾아나가는 또 하루에 주어짐에 감사하자. 그리고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에게, 나에게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뮤즈들에게 충실하고 또 감사하자. 부족한 나임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삶에 정진하는 것. 그게 구도자의 삶이 아니면 무엇인가.





22.10.06 (목)


(..)

외우기 시작하니까. 아니, 외우겠노라고 선언하니까 그제야 외워지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이게 될까?'하고 스스로 반문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가능과 불가능의 여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이걸 해야겠어!'라는 단순한 마인드가 때로는 더 많은 것을 가능케 한다.


(..)

감사한 마음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만든다. 미소는 그 자체로 따스한 성질을 지녀서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마저도 녹아내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암세포는 차가운 온도를 좋아한다고 한다. 차가운 온도는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시니컬함, 냉소, 비웃음, 회의, 비관 등 감사와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마음이 자리 잡고, 그런 차가운 마음은 몸과 마음의 온도를 더 떨어지게 만든다. 암세포가 가장 반길만한 환경이다.


최고의 묘약은 제약회사가 개발한 신약이 아니다. 엔돌핀과 다이돌핀으로 대표되는 인간 체내에 내장된 행복과 사랑, 감사와 감동이 자아내는 호르몬이야말로 인간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최고의 영약이다. 


우리 안에 답이 있다는 말은 비단 정신적 영역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었다. 육체에 대한 해답 역시 밖에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우리 안에서 구해야 한다. 인체에는 스스로 회복하려는 성향이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미세할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신경을 쓰겠다 마음먹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른 결과를 자아낸다. 글씨만이 아니다. 모든 게 그렇다. 의도가 다르다면 결과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여도 그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나무와 풀도 씨앗 상태일 땐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드러나는 결과물에서 큰 차이를 보이듯, 의도를 담은 행동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실리며, 그것이 쌓여 나중에는 의도가 실리지 않은 빈 강정과 같은 행위와 비교했을 때 괄목할 만한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하라.

중요한 것은 당장에 겉으로 드러나는 능숙함과 미숙함의 정도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의도와 진심이 먼저다.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은 누군가가 뜨거운 가슴으로 품은 의도에서 시작된다.




22.10.07 (금)


(..)

Cui Bono? 혼란과 아비규환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 사람이 범인이다.


(..)

E.H 카는 역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와 현재가 분절되어 서로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단순한 정보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강물처럼 멈춤 없이 계속 흐른다. 우리가 바다에 몸을 담근다면 그 물은 깊은 산속의 계속에서부터 시작되어 굽이굽이 흘러 바다까지 온 것이리라.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현재가 바다라면 우리의 바다에도 '수원지'는 존재하리라. 


그 연속성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감수성이 있을 때 비로소 카의 정의는 교과서 상의 텍스트 신세를 면하게 된다. 우리가 어디서 흘러 어디로 가는지. 지나온 길을 알고, 또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아는 것. 그것이 역사를 바로 아는 자가 지니게 되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

섣불리 남을 돕고자 하지는 말자. 우선 나의 의도가 정말 순수한 선의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남에게 베푸는 행위를 통해 인정받고자 하고, 더 나아가 명망을 얻으려 하는 욕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마음을 품는 순간 내 앞의 사람은 '활인'의 대상이나 목적이 아니라, 내 욕망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

올바른 사회, 더 나은 세상으로의 도약에는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목적 그 자체로 대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

돈을 써야 하는 1순위는 바로 빚 청산과 스스로에 대한 투자다. 배움에 대한 투자, 나의 몸에 대한 투자, 그리고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투자. 이 모든 곳에 골고루 배분하여 소비를 하고 그 뒤에야 저축이든 뭐든 미래에 대한 대비가 이뤄져야 한다.


(..)

만물은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돈에도 에너지라는 게 있다. 이러한 에너지는 끼리끼리 이합집산을 한다. 그렇기에 돈을 현명히 대하는 사람에겐 돈이 따르고, 돈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에겐 늘 가벼운 지갑이 따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

영원한 삶, 보장된 미래만큼 인간을 나태하고 타락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내일이 없는 사람만이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불로장생 약초라도 먹은 듯이 사는 사람은 반드시 죽기 전 후회로 가득한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죽음을 가슴 한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의 삶은 후회보다는 감사와 사랑의 연속에 더 가깝다. 그 연속된 에너지는 그의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어져 미소를 지으며 후회 없이 이 땅 위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다시 그가 왔던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지만 매 순간 더 나은 선택지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들이 펼쳐지는 순간의 양상들이 워낙 다양하기에 우리는 삶에 있어 단 하나의 정답의 길을 제시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각자가 처한 개별적이고 고유한 상황들 속에서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은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 체계나 문화적 관습 혹은 법과 같은 제도에 의해 마련된 기준에 따르는 결과는 아니다. 그 답은 오직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기준에 따를 때 찾을 수 있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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