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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25. 2022

壬寅년 庚戌월 세 번째 기록

22.10.16(일) - 22.10.22(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0.17 (월)


(..)

내용에 대한 숙지가 잘 되어있을수록 자신감이 더 커진다. 무슨 질문이든 해봐라, 어차피 내가 더 잘 안다. 이런 생각이 쫄지 않는 마음을 만든다.

(..)

다수의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은 여전히 내 심장을 평소보다 더 뛰게 만들지만 그게 나를 숨 막히고 주눅 들게 할 정도는 아니다.

(..)

통제형 성향이 갖는 의의는 주체성에 있지 않나 싶다. 단순히 계획적으로 사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을 주도한다는 그 느낌이 좋은 것이다. 

단지 계획이 좋은 것이라면 남이 짜준 계획만을 지키며 사는 것과 자신이 직접 계획을 짜며 매일 주체적인 선택의 연속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큰 차이가 없어야 할 테다.

(..)

눈으로 보이는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의도의 선언이다. 마음속에 행동의 씨앗을 품는 것. 그것이 오늘 하루를, 그런 씨앗을 가슴속에 품지 않았을 때와 구별지어 주는 것이다. 계획이란 그런 의도의 드러남에 불과하다. 

그러니 계획의 달성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삶에서 매 한 걸음의 양상에 신경 쓰는 것보다 큰 관점에서의 방향성이 더욱 중요하다. 매 걸음의 보폭과 각도 등에 지나치게 골몰하다 보면 방향성을 잃기 쉽다. '그런데, 내가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었더라?' 하며 현타가 와서 스스로에게 되묻기 십상인 것이다.




22.10.18 (화)


(..)

모닝 페이지와 퇴고는 양립할 수 없다.

(..)

꿈 묘사만으로 50분이 다 지나갔다. 내가 지금 너무 쫓기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앞으로 1인 기업처럼 살려면 더더욱 많은 일정들이 나와 엮일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쫓기는 꿈을 꾸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식은 평온해 보였으나 무의식까지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22.10.19 (수)


(..)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도 이렇게 일반 독자들에게서 좋다 나쁘다 평을 받는다. 심사위원이라는 존재 역시도 결국엔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세계적인 작가들은 독자나 다른 비평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작품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대중은 그들이 만들어 낸 작품은 평가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경험한 깊은 몰입의 경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나를 잊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게다가 그것을 직업적으로, 꽤나 많은 시간 동안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지다.

그런데 그들에겐 그런 몰입의 상태가 지극히 당연한 일상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하고 있는 그 일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그 일을 할 때만큼은 마음을 비우고 무념무상으로 임할 줄 아는 사람이리라.

어느 쪽이든 여러 가지 길의 다양한 케이스일 뿐, 결국 도달하는 것은 나를 잊을 정도의 깊은 몰입이다. 나를 잊는다는 것은 자신이 개별적이고 독립된 존재라는 자아 인식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자신이 몸담고 발 딛고 있는 그 순간과의 합일이요, 현재에 온전히 머무는 현존이요, 나 자신이 곧 우주가 되는 범아일여의 경지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잊음으로써 비로소 내면에 자리 잡은 본질적인 존재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낸다. 작품은 그러한 본질의 빛의 숨결이 세상에 드러난 여러 방식 중 하나다.

(..)

낭만에는 불편함이 따른다. 불편함이 없는 삶, 어느 정도의 고단함이 없는 삶은 낭만을 노래할 수 없는 삶이다. 스승님의 강의 중에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일이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삶은 최고의 형벌이라는 것.

(..)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삶에 있어 어떤한 굴곡도 겪지 않는 삶은 좋아 보이지만 되려 불행하다. 반대로 누가 봐도 불행할 것으로 생각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려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삶을 사는 필부필부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만물이 곧 극과 극에서 서로 통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

자질구레한 방법론에 지나치게 주의를 빼앗길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실을 다지는 것. 그리고 자신의 때를 아는 것. 누구에게나 비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가 반드시 존재한다.




22.10.20 (목)


(..)

매일 아침, 오늘도 새롭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는 게 때로는 다소 기계적이라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육신이라는 아바타를 타고 경험할 수 있는 이 게임의 장을 또 하루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

성공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던 실용서적에서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같이 들리지만 삶의 이치를 드러내는 책으로 트렌드가 옮겨가는 것이 보인다.

(..)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대를 대화나 강의 등에 참여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동등한 입장의 미팅이나 혹은 자신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상대에게 섣불리 던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상대의 정보만을 캐내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비즈니스 미팅의 원칙은 신뢰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미팅에서는 서로가 받으려는 마음보다 주려는 마음을 가질 때 서로에게 득이 되는 결과가 얻어지는 확률이 높아진다.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한 두 사람이 만난다면 그 미팅은 성사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장기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밖에 없다.

(..)

결코 내가 원하는 것부터 들이밀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나로부터 얻어 갈 수 있는 것을 먼저 제시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상대도 안다. 준다고 넙죽 받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받기만 하고 입을 싹 씻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에서 곁에 두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려낼 수 있게 됐다는 뜻밖의 장점도 있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포(라포르)의 구축이다.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스몰 톡을 하든, 미리 파악한 상대의 관심사에 걸맞게 질문을 던지든 상대와의 감정적 유대를 쌓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요 근래 상담을 할 때 나는 라포를 형성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을 할애했는가?

결국 이런저런 접근 방식은 하나의 길에 불과하고 여러 길이든 방향이라는 하나의 의도는 분명하다.

받기보다 주려고 하라는 것. 'Giver'의 마인드 셋을 장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스킬이 아니라 우주 만물에 깃든 生의 법칙이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돕고자 한다면 상대 역시 감사의 마음으로 화답을 한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답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발생한 긍정의 에너지는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온다. 

그러나 이것이 와전이 되어 내가 받고 나면 그제야 상대에게 뭔가를 줘야지 하고 생각하는 Give & Take의 사고방식이 요즘 세상에는 만연하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자신의 내면에 본래 깃들어 있던 生에 대한 의지가 혼탁해지고 변질된 것이다.

(..)

우리가 결국엔 하나로 연결된 존재들이라면 서로는 서로의 존재의 의의를 빛나게 해주는 경험을 하도록 돕는 관계인 셈이다. 그것이 설령 인간 사회가 만든 규약이나 호불호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주라는 전체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셈이다. 모든 것을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다 분석하고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 깊은 심해조차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문명의 현주소인데, 하물며 '소우주'라 일컬어지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주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를 수 없는 산이므로 올려다보지도 말라는 게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서 끝이 있는 곳이라 짐작되는 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나가야 한다. 동시에 섣불리 자신이 오른 그곳에 정복의 깃발을 꽂지 않아야 한다. 

길은 언제나 새롭게 더 놓인다. 죽음이라는 이 행성에서의 경험을 매듭짓는 최종 관문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각자의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겸허한 마음과 정진하는 태도는 각자의 앞에 놓인 길을 걷게 해주는 튼튼한 두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22.10.21 (금)


(..)

단지 아파트에서 하는 작은 마켓일 뿐이니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 타고난 천성 혹은 에고는 단 하나의 부정적인 요소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삶은 음양의 조화라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타로 마스터 정회도 씨도 틀릴 때가 있고, 자청 씨도 세바시에 출연해서 강연을 할 때 버벅거려서 PD 님께 죄송했다고 했다. 각 업계의 고수들조차 그러할진대, 나라고 다를쏘냐. 

'완벽함'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 현실에서 무결점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완벽주의보다 놀이 주의를 가져보면 어떨까? 호기심과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온전히 거기에 몰두해 보는 것이다. 집착을 버리면 오히려 집착할 때 더 손에 잡히지 않던 그것을 더 쉽게 얻을 수도 있다.

(..)

가을은 짧고 인생은 유한하다. 유한한 자원을 대할 때 있어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이고 또 하나는 몰입과 현존이다.

(..)

나는 나의 이름이 길이 남아 영원히 기억되기보다도 나의 말이, 나의 표현이, 사람들에게 전한 울림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내가 남을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기 때문일 테다. 


나의 말 한마디, 혹은 이렇게 남겨둔 생각의 흔적들이 누군가에겐 큰 울림이나 영감을, 때로는 위로를 전할 수도 있지만 누구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별것 아닌 존재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기록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든 스쳐 지나가든 사람이든 사실 내가 전파한 에너지의 총량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반응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단지 내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주파수와 동일한 주파수의 에너지가 내면에 얼마나 쌓여있었느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변화에는 예외 없이 임계치가 필요한 법.

(..)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단독으로 사람을, 세상에 드라마틱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늘리는 것뿐. 나머지는 모두 하늘에 맡기는 진인사대천명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

전심을 다하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 태도는 어떤 고고한 경지가 아니라 누구나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겠는가?

(..)

물론 모두가 각성할 수도, 모두가 깨어날 수도 없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몇몇 사람들만이 각자의 앞에 놓인 그 길을 걸어갔을 뿐이고, 걷다 보니 자신의 길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길임을 깨닫는 것일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우주가 부여한 저마다의 역할에 이미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

행복이라는 막연하거나 주관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는 개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 지금의 나의 삶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양상이 좋으냐고. YES라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이다.

(..)

오늘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순간이다. 물론 그것은 미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콧방귀를 뀌지 않는 사람들 만이 미래 또한 소중히 여길 줄 안다.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 오늘을 희생하는 한 내일은 없다. 매일 희생되는 오늘만이 반복될 뿐이다. 오늘이 지나면 그 오늘이 바로 내일이 된다. 현재를 희생하면 미래가 그 현재가 될 뿐이다.




22.10.22 (토)


(..)

어딘가 근심이 가득하여 자신을 찾아왔을 내담자의 근심을 날려주고 싶다는 그런 절박함이 가슴속에 똬리를 틀 때 순간적으로 그 주변에는 에너지가 응축된다. 그 에너지가 명확하고 청할수록 카드의 리딩이 깔끔해진다고 한다. 대충대충 별 의미도 두지 않고 뽑는 카드는 그만큼 정확도도 떨어진다.

(..)

녹차의 카페인이 더 오래간다고 한다. 나는 폭발적인 불보다는 모닥불이나 연탄불이 좋은 사람이니 녹차가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국산이잖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입 해오는 커피에 비해 탄소 발자국도 훨씬 많이 줄일 수가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잔존하고 있을 여성 및 아동 노동 착취 문제에도 간접적으로 일갈을 던지는 셈이다. 

금번 SPC 사태를 보며 누군가는 한국인의 냄비근성으로 금세 잊어버릴 여러 사건 중 하나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 피해자분의 영혼은 억울함을 안고서 구천을 떠돌고 있으리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비명횡사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분노와 억울함이 아니라 사랑과 소망, 믿음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려 유명을 달리하신 그분의 명복을 빈다. 

허망한 죽음, 그리고 그런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갱각하는 기업 총수들. 더욱 무서운 것은 침묵하는 다수, 생각하지 않는 다수다. 소비자들만이 불매운동을 할 게 아니라 가맹점주들도 다 들고일어나야 한다. 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윗선에서도 뻔히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쥐고 있는 목줄엔 사실 아무것도 묶여있지 않음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

그럼에도 이것이 현실로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또 꼭 그래야만 할까?라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것이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법적 체계나 도덕 기준과는 다르다. 우주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분노든, 그렇지 못한 분노든 남을 해하려는 마음이란 측면에서는 모두 파괴적이다. 파괴의 에너지는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는 또 다른 사람, 사건을 끌어들인다. 화불단행이라는 말은 그런 현상을 정확히 짚어낸다. 

따라서 최고의 복수는 어쩌면 용서인지도 모른다. 상대는 파괴의 주파수를 만들어 냈지만 나는 거기에 공명하지 않는 것. 평온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의 주파수 공명대와 나의 공명대가 서로 엮이지 않고 각자의 방향대로 흘러가게 하는 방법이다. 거기에 더해 되려 그 사람의 주파수를 내 쪽으로 오게 할 수만 있다면야 더욱 뛰어난 처세가 되리라.

쉽사리 분노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낮은 주파수대의 감정은 주체를 잠식하기 쉽다. 감정에 잠식 당한 사람은 삶의 주도권을 감정에게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지나고 돌아보면 후회할 언행을 일삼게 된다.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첫 단추를 꿰는 것이다.

(..)

삶의 모든 것을 100% 다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제법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꽃이 피면 다시 지고, 밤이 가장 깊을 때 동은 다시 튼다는 이치에 맞게 살아가는 현명한 사람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그 흐름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정한다. 물론 그것에 대해 안다고 모두가 부귀를 거머쥘 수는 없다. 모두가 그렇게 되는 세상은 당연히 우주의 질서에도 어긋나기에 그런 일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다만 모두가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각 개인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상정해야 하는 이유다. 종교도 좋고 철학도 좋고 영성도 좋다.

큰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언제나 숲보다는 나무 일색이다. 자신이 숲의 일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다른 생명체들과 비교 경쟁하면서 아등바등 살게만 된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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