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의 글
비건을 지향하고 나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두말할 것 없이 과일이다. 그전까지는 과일을 학창 시절 급식판 귀퉁이에 놓이는 디저트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집에서 엄마가 "과일 먹어~." 하고 부를 때만 쪼르르 달려가서 몇 조각 얻어먹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직접 과일을 사 먹는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과일의 세계에 눈뜨니 도무지 이 달콤한 요물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과일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한 끼 식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내외에는 과일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프루테리언'들이 있을 정도로 과일에는 영양소가 풍부하다. 수분과 섬유소 함량도 높아서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러온다. 게다가 가공되지 않은 살아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과자, 빵보다도 훨씬 건강에 좋은 간식이 되어주기도 한다.
요즘 나의 아침식사는 과일이다. 원래 아침밥을 챙겨 먹지 않기 때문에 출출할 때 과일을 먹어주면 기분 좋은 포만감이 느껴진다. 과일을 깨끗이 씻고 썰어서 예쁜 접시에 놓아두면 보기에도 좋고 내가 나를 대접해주는 기분이 든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아서 바쁜 아침에 작은 시간을 들여 크게 행복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내 삶에 과일이 들어온 뒤로 내 식탁은 더 평화롭고 알록달록해지고 있다.
점심으로는 주로 바나나 스무디를 해 먹는다. 바나나 4개를 핸드믹서로 갈고 그 위에 그래놀라, 블루베리 등 다양한 토핑을 얹어준다. 여기에 통밀 식빵까지 곁들이면 누가 뭐래도 완벽한 한 끼 식사가 된다.
과일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제철과일에 있다. 과일가게에 들를 때마다 매번 같은 과일만 놓여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지루하고 재미없다. 제철과일 덕분에 과일가게는 매일 조금씩 다른 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그걸 보는 우리의 눈은 덩달아 즐거워진다. 밋밋한 일상에 다채로운 생기를 불어넣어 준달까.
우리는 제철과일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연말이 가까워짐을 알려주는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과일도 그런 역할을 한다. 과일가게에 진초록색의 복스러운 수박이 보인다 싶으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 거칠지만 어딘가 푸근하게 생긴 배가 보이면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오랫동안 안 보이던 과일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으면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만나는 드라마도 그렇게나 반가운데 1년의 기다림 끝에 만났으니 오죽할까. 온갖 비바람을 뚫고 세상으로 나와준 과일을 보면 애틋하고 기특한 마음이 든다. 나도, 너(과일)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재회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남몰래 안도감을 느껴본다.
제철과일에는 최대한 돈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지금이 아니면 또 오랜 시간을 그리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수박 멜론 자두를, 가을에는 무화과와 양홍장 황도 복숭아를 즐겨 먹는다. 지난가을에 정말 맛있게 먹었던 양홍장 복숭아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성호와 둘이서 2주 만에 총 4박스를 사 먹었다. 내 지갑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오늘 과일 가게에 무화과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또 여름이 끝나가고 있나 보다.
이따 잠깐 들러서 가을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