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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27. 2022

누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비판이라는 착각

신(이 존재한다면)이 완벽한 존재라면, 그의 모상에 불과한 인간은 아무리 잘나도 결코 완전할 수는 없다.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어리석음'을 가진 존재라는 뜻.


어리석은 존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는 종종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 기대와 선망으로 가득 찬 나머지 그 대상을 자기 멋대로 신격화하는 것이다.



나 또한 최근에 그런 우를 범했다. 취미로 배운 전통 활쏘기와 침술을 알려주신 스승님이 편찮으시다는 소리를 들었다. 걱정이 되는 한편 간사한 실망감도 살짝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당신께서 글로 적어낸 것과 실제 행한 것 사이에 간극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양생술로써의 활쏘기를 강조하시는 분은 아프면 안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도 결국 인간이고 나이가 들면 인간은 모두 병이 드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을.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 깨달았다. 나는 어느새 그분을 신격화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의 멘토나 스승을 신격화하는 습성이 있다. 단순한 존경심을 넘어 맹목적인 믿음, 그리고 그 분야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하고 만다. 그래야 스스로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이 걷는 그 길이 위대해지고 그 길을 걷는 자신도 위대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심리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사이비 종교의 폐해 중 가장 큰 것은 교주가 아니고 교리도 아니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 혹은 믿는 척하는 사람들에 있다. 모든 신도들이 그것을 삶의 도피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폐해다.


그들에게 교주의 숨겨진 민낯을 까발려도, 교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린지 알려줘도, 심지어 교주가 직접 나서서 교리에 나온 구원이 일어났다며 이제는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라고 '임무의 종료'를 선언해도 그들은 쉽게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주가 문제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하던 나는 후두부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도 결국 사람인데, 저마다의 불완전한 비이성적 판단을 내린 결과로 거기에 발을 담그게 됐을 것이다. 그 이후에 파국으로 치닫는 행보 역시도 개인의 불완전함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도 욕하고 신도들도 욕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는 '일반적인'(무엇이 일반인가?) 사람은 그렇다면 완전한가?


꼭 '정상적인' 종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저마다의 신념과 믿음으로 일군'개인적인 종교'가 있다. 스트레스를 풀 때는 어김없이 배달의 민족을 찾거나, 편의점에서 만 원들이 4캔(요즘엔 5캔에 11,000원이더라) 짜리 맥주를 집어오거나 하는 사람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잔뜩 사며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겉에 대한 치장이 자신의 품격을 한껏 드높여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모두 각자만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비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에 따른 비합리적인 결정을, 다른 누군가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행동들을 일삼곤 한다. 내가 보기에 모두 거기서 거기다.


그렇기에 우린 남의 삶을 까내리고 비판하며 날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 이해 되어야만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몰상식, 악으로 규정짓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이 분노하는 자들,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자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확신이 없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기 삶의 옳음을 유지하려면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의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모르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은 없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해 보고자 하는 일말의 시도조차 없이 그들의 존재를 혐오하고 부정할 뿐이다.


개개인의 갈등, 사회적 갈등은 모두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상대적 정의, 주관적 정의를 가지고만 세상을 이해하려 하니 반드시 주관적 영역끼리의 충돌이 발생한다.


도의를 저버리고 대놓고 남을 해하려는 의도를 품는 게 아니라면 인간이 벌이는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과 행동은 자기 자신도 어딘가에서는, 특정 상황에서는 했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특이한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마침 그 순간에 특이한 언행을 일삼았을 뿐이다.






타인을 비방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비판하는 게 때로는 어라만 무의미한 짓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저 모두가 차례로 돌아가며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A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a가 b를 비판하고, B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이번엔 b가 a를 비판한다.



비판과 비난은 다르다며 자신이 하는 것은 비판이라고 , 필요한 말이라 생각해서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게 일반인이든 전문가든, 혹은 그것이 비판이냐 비난이냐 그 껍데기의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당사자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 그 말의 의도가 정말 상대를 위함인지, 세상의 따스함을 위함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만의 정의에 맞는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 '적군'을 축출해 내기 위함인지를 똑바로 파악해야 한다.



감정적이고 논리가 없으면 타당하지 않고, 논리와 근거 지식만 갖추면 비판이랍시고 칼럼이나 사설에 띄워주고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받아들여지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글쓴이의 숨은 의도에 대한 파악은 안중에도 없다.


혼란스러운 세상일수록 더욱이 서로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것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며 또 한 성급하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질문이 결여된, 직감에만 의존하는 판단에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히 그것이 사람에 대한 판단일 경우엔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당신은 결코 누군가를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면밀한 대화를 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지도, 안 다고 지껄여서도 안 된다. 오래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판단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 그러라고 신이 내린 이성과 논리력이 아니다.



존재를 대할 땐 존재 그 자체로 대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 바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대표되는 열린 마음이다.'왜 내 기준대로 하지 않지?'라는 분노에 찬 질문,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 상대를 알아가고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써 질문해야 한다. 이 질문에는 기대되는 모범답안 같은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할 때, 내가 떠들기보다 상대가 말하도록 할 때, 그때 비로소 상호 간에 이해의 교각이 놓이게 된다. 두 세계라는 섬 사이에 놓인 교량으로 인해 고립되어 있는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더 큰 세게로 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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