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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Dec 04. 2023

내 인생 최초의 모닝 페이지

[특별편] 주간단남 기록의 시작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이번 주는 개인 사정상 모닝 페이지를 적지 못했습니다.

그냥 한 주 쉴까 하다가 그래도 주간단남 업로드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리다가 제 시작점을 돌아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오랜만에 예전에 쓴 모닝 페이지들을 펼쳐봤습니다. 


4년 전이기 때문에 지금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도 보이고,

4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한결같은 모습들도 보이네요. 한결같아서 멋진 부분도, 꼴 보기 싫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모닝 페이지(글 명상)을 시작했던 2019년도 초반 3주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일부 부분들 발췌하여 공유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기존의 모닝 페이지로 돌아오겠습니다.


꾸벅






19.01.29 (화)


(..)

지금 나는 추운 겨울, 차갑게 냉기를 뿜는 책상과 웃풍이 들어오는 창문 앞에 앉아 내 인생 첫 모닝 페이지를 작성 중이다.


(..)

내가 그린 것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재밌어하거나 하는 그런 긍정적인 반응이 가장 즐거웠다. 이런 내 꿈이 좌절된 건 4학년 클럽활동 시간이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골랐던 '만화부'에서 5~6학년 형, 누나들의 '클라스가 다른' 그림 실력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고 난 것이 계기였다. 클럽활동 담당 선생님, 같이 지원한 내 또래 친구들의 관심의 대상은 더 이상 나의 그림이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깨달았다.


(..)

물론 그땐 어려서 스스로에게 삶이라는 게 원래 각자의 호흡과 속도가 있다고, 넌 너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면 된다고 위로의 말을 건넬 재간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항상 최고만을 우대하고 기억하기에 그런 가치관이 어린 나에게도 알게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던 것이다.


(..)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은 그래도 내가 어릴 적 그런 꿈이 있다고 하면 뭔가 더 '명예로운' 직업으로 나의 꿈을 '재설정' 해주는 꽉 막힌 타입의 양육자는 아니셨던 것 같다.


(..)

2019년 나의 모토는 '여유, 건강, 심플'이다. 


나는 사람들이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바쁘고 치열하고 뒤처질까 봐 조바심 내기보다는 본인만의 페이스로 여유 있게 인생을 살기를, 또한 소비하고 소유하는 것에만 가치를 두기보다는 향유하고 경험하고 사색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삶을 더 많이 살기를 바란다. 그런 행보를 만들어낼 전도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그런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하겠지.




19.01.30 (수)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으나, 늘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 상태에 놓여있는 것만이 지극히 정산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탓에 그 관성이 쉽게 어디 가지는 않는다. 자꾸 하루를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이 흘려보내버린 것만 같고 낭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빽빽한 스케줄표를 봐야 내가 제대로 살고 있구나라고 '착각' 하던 지난날의 '나'였다면 아마 지금 내가 보내는 일상들의 모습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

나를 찾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데 왜 항상 막연하기만 하고 미지의 영역인 것 같고 또 누군가에겐 사치스러운 행위여야만 할까?


(..)

이런 얘길 대중적으로 당당히 하면 어떤 소릴 들을지 겁나지만 사실이다. '진실'은 우리가 살아있고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 하나다.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은 똑같이 살아있고 실존하며 우리와 많은 것들을 함께하며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을 잊은 채 돈, 명예, 권력 등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들을 위해 우리는 실존하는 모든 것을 늘 뒷전으로 둔다.




19.01.31 (목)


(..)

비록 그는 남일이라서 쉽게 말한 것일지도 모르나,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 안에 너무 갇혀 있으면 때론 간단한 일도 그 감정이라는 커다란 안갯속에 갇혀 어디가 어디인 줄 모르는 길 잃은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잠시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한걸음 물러서 바라보면 생각보다 명쾌하게 일이 풀릴 수 있음을 말이다.


(..)

근거 없는 나르시시즘은 깨질 때 그 여파가 너무나도 크다. 내면부터 꽉꽉 다져진 콘크리트 같은 사람이 되자. 속은 텅 비고 겉만 번지르르한 도자기나 유리잔같이 거짓된 자존감으로 나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

먼저 지난 세월을 내 안의 '검열 센서'가 지배하는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완성되고 남들과 멘탈적으로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모두가 버티며 사는 그런 인생이라는 레이스 속에서 지쳐 떨어져 나온 도망자와 같은 존재임을, 그곳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단단해질 수 있다. 흔들림 없이, 내 생각을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남과 나를 비교하며 교만해지거나 비참해지지 않는, 그런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19.02.02 (토)


(..)

너무나 오래 스스로를 억제하며 살아왔기에 쉽지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자, 마음껏 춤춰봐라 내 안의 작은 아이야. 네가 가진 창조성을 한껏 드러내보렴.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한 걸음씩 내디뎌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가보자!




19.02.06 (수)


(..)

내 의견만 맞는다고 아득바득 우기는 행위는 그 의견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옳다고 하여도 그 태도에서부터 문제가 된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방적인 주장은 이유와 종류를 막론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그런 가부장적 모습 뒤에 숨은 고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어떠한 이유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더 효과적으로 내가 지닌 약자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을 설파할 수 있으리라. 


지금의 난 눈과 어깨에 힘이 너무 잔뜩 들어가 있다. 아닌 게 보여도 바로 지적부터 하지 말고 그것을 먼저 잘 이해하려고 해보자.


(..)

조급하게 살면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 특히 소중하고 익숙한 사람일수록 더욱더 소홀하게 대하기 십상이다. 늘 마음에 여유와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자. 주변을 더 둘러보자. 한정된 인생이라는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사랑하며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두자.


(..)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던 '부모'라는 존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계속 지속 되어온 한편으로는 당연한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화에 반하여 비혼이 자의적/타의적으로 늘어가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의문을 단지 시대의 변화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인류라는 종이 자식 번식의 본능을 거슬러 본인의 삶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가치의 방점을 달리 찍기 시작한 것일까? 종족 번식을 멈춘다는 것은 곧 종족의 멸종을 의미한다.


이 상황을 인류는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복제인간? 양육은? 양육 전문가가 따로 생길까? 부모라는 존재의 개념이 지금과는 180도 다른 것으로 변하는 세상이라도 오게 될까? 각 개인이 자신만 생각하는 쪽으로 변해가는 사회의 현상을 마냥 존중하기만 해야 할까? 지구에서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대신 인류에 대한, 혹은 지구 행성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내 머릿속엔 늘 양가적인 입장이 대립한다.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집단 내에서의 책임감과, 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유와 주체성에 대한 욕구가 말이다. 인생은 왜 양자택일이어야 하나. 둘 다 가지면 되는 것 아닐까?



19.02.08 (금)


(..)

누군가 내 입장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이상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것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이해를 하려 해보든지, 그것이 아니라면 필살 스킬인 '그러려니' 정신으로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을 뿐,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 자기합리화가 아닌 진정한 이해의 시도를 해보라. 물론, 그렇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본인의 피해 상황까지 그런 식의 이해를 먼저 앞세우란 것은 절대 아니다.




19.02.10 (일)


(..)

계속 있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몇 사람들만 계속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풍성한 자리가 좋다.


(..)

친구들을 다 보내고 남은 그가 나에게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맥주 한잔을 사겠다고 했다. 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나는 비밀을 잘 지킬 것이라는 신뢰도가 있어서? 혹은 그러거나 말거나 나에게 뭔가를 털어놓는 게 마음이 편해서? 나에게 어떤 조언을 구하고 싶다거나, 자신에 대한 나의 견해가 궁금해서?


어느 쪽이든 간에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19.02.11 (월)


(..)

연인이 나와 꼭 모든 것을 함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상대로 하여금 미안함과 부담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부모가 권하는 길을 낡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인이나 친구들에게는 자신과 취미든 뭐든 함께 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자신의 생각에 상대가 동의하기를 바라고, 심한 경우 생각을 강요하기도 한다. 인간은 어찌 이리도 이기적이고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인가.


진정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저 묵묵히 응원해 주자.


(..)

누군가와 경쟁할 필요도, 누군가를 이기려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면 스스로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를 실체화하여 계속해서 쌓아나가자. 미래엔 그것이 자산이 될 것이다.




19.02.12 (화)


(..)

하루빨리 나도 나만의 수입원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내 멋대로만 사는 것을 지켜보며 각종 우려와 근심 걱정을 하실 부모님이 늘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급함에 매몰되어버리고 싶지도 않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을 그 자체로써 가치있게 보지 않고 자꾸 '자본주의적 쓸모'라는 잣대로만 보게 되기 때문이다.


(..)

당장에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나의 내면의 창조성이 안내하는 대로 묵묵히 따라가 보자. 내가 추구하는 다양한 세부 항목들이 크게 보면 비슷한 관점으로 묶이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나를 움직이는 어떤 커다란 기운이 있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내 안의 창조성이 이제야 다시 꿈틀거리며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중인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 그렇게 믿을 것이다.




19.02.14 (목)


(..)

나는 신의 창조성의 통로이고, 내 작품은 결국 훌륭해질 것이다.

내 꿈은 신에서 나왔고, 신은 그것을 이루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


위 글귀들을 계속 되뇌다 보니 신기하게도 창조 욕구가 샘솟는 것 같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

'나는 안돼'라는 내면의 울림이 쥐의 발자국 소리만큼이라도 나지 않게 하자. 내 안에는 창조성이 꿈틀대고 있고 그것을 부드럽게 살살 깨우고 길러주다 보면 어느새 완연한 창조가로 거듭나 있을 것이라고 믿자. 내면에 스치는 아이디어는 의미 없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필연적인 운명의 산물이다.


이것을 거부하고 미루는 것은 나의 선택이나, 동시에 그것은 내면의 깃든 창조성이라는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창조'하는 것이지 '성공', 그것도 남들이, 사회적 기준이 정해준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유념하자.


내 안의 에너지를 죽이지 않고 발산하여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희열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남들이 그것에 반응하고 좋아해 주는 것은 부가적인 효과이고 결과이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조건이 아니다. 창조성에는 타인의 관심이 필수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리고 나는 타인의 관심이나 평가를 두려워하여 뭐든지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다. 한심해 보일까 봐, 실망시킬까 봐, 성공하지 못할까 봐, 시간 낭비만 될까 봐 등등.. 이유는 차고 넘치며 만들면 무한대로 양산할 수 있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는가? 왜 이 세상에서 개인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바탕으로 본인의 창조성에 맘 편이 집중할 수 없는가? 창조성 회복 훈련을 하고 있는 상황이 가끔씩 우습게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시대에 대한 유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조차 바보 같은 짓, 쓸데없는 짓이라며 비아냥 거리며 멋진 차와 옷을 입고 러시아워를 뚫고 출근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그 차와 옷의 할부금을 갚기 위해 말이다.


(..)

매일 모닝 페이지를 쓰고 정기적으로 아티스트 데이트하는 것을 통한 창조성 회복 훈련을 꾸준히 '즐기다' 보면, 어느샌가 늘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창조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그 자체로 즐기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23년 현재의 나의 대답: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물론 앞으로 쉽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쉬운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창조성의 목소리가 이끄는 삶을 그저 살고자 할 뿐. 그것이 어려워 보여서 또는 쉬워 보여서는 전혀 선택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9.02.18 (월)


(..)

내 생각에 그 말의 핵심은 도피는 결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싫은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본인이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다.


(..)

그의 주장과는 달리, 나는 모두가 삶의 의미와 이상을 설정하고 그 방향을 향해 전문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더 유리할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면야 동의하겠지만. 어떤 주장이든 정답과 오답을 나누는 식은 옳지 않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시대적 오점의 사례로 남게 될 뿐이다. 


(..)

그러면 안 되는 삶이란 없다. 삶의 낭비도 없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요, 누군가에겐 과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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