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May 09. 2024

활쏘기의 목적은

활을 쏘는 것이다

자유 직업인의 아침은 이따금씩 스스로와의 전쟁이 되곤 한다. 아침부터 일이 쌓여있으면 일이 쌓인 대로, 일이 없으면 그럼 무엇을 하나 싶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니 쉬이 일어나질 못한다. 그러다 이불속으로 숨어버리기 일쑤다. 외면하고 잠을 자버린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에 대해, 행위가 미칠 영향이나 여파에 대해 지나치게 미리 생각하다 보면 행동 자체를 못한다. 이건 이래서 저렇고 저건 저래서 저래. 사람을 만날 때 조건을 지나치게 따지는 사람은 관계 자체를 맺지를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게는 목표라는 존재가 딱 그렇다. 세상에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없다. 목표는 동기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되레 동기를 상실케 만들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녔다. 시작하기도 전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에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에 설레면 동기부여가 되지만, 압박감이 느껴지면 첫걸음조차 떼지를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길이 생겨나는 원리를 떠올려 본다. 누군가 인적이 드문 곳에 첫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하고, 그다음 사람이, 또 다음 사람이 그 길을 뒤따르다 보면 어느새 땅이 다져지고 길이 생겨난다. 길이 생겨난 뒤로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 길로 걷게 된다. 사람들은 길이 있어야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냥 걷기 시작하면 그곳에 길이 생겨난다. 일단 저지르고 수정하는 노선을 전략으로 택한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둔 덕분에 예상 가능한 삶의 행로 속에서 안전하다고 '믿으며'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뿐이다.



2년 전 내가 활을 처음 배울 때 당시 사범님이 수강생들을 한데 불러 놓고 하신 말씀이 있다. 교육이 꽤나 진척이 되어 저마다 활 쏘는 폼이 그럴싸해졌을 즈음이었다.


 "지금 이 자세를 잘 기억하세요. 나중에 과녁을 보기 시작하면 저마다의 자세로 바뀌기 십상입니다."


지금은 과녁을 보지 않고 자세를 익히는 것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가 바르고 각자의 자세가 비교적 통일된 모습이지만,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하면, 즉 목표가 생기기 시작하면 어느새 자세를 유지하는 것보다 그 목표를 맞추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게 그 말의 골자였다. 과녁을 더 잘 맞히기 위해 신경 쓰다 보니 오히려 자세가 다 망가진다는 것.


이어서 사범님은 과녁에 잘 맞지 않을수록 그것을 맞히기 위해서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고 하는 게 아니라 다시 본인의 자세를 가다듬으며 정말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지켰는지를 돌아보기를 강조하셨다.


멋진 말 수집가(?)로서 그때 당시에는 단순히 멋진 말이라며 그 말을 메모해두기만 했다. 그러나 그 뒤 2년이 넘도록 활을 쏘며 나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을 보니 그 말은 정확히 적중했다. 당시 활을 함께 배운 모든 수강생의 궁체는 달라져있었으며, 이제는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배웠는지 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목표가 '자세를 바르게 하기'에서 '과녁 맞히기'로 바뀌면서 기존의 목표가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주객전도 현상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궁사들이 겪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행위의 목적은 그 행위 자체에 있을 때 가장 숭고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표라고 부르는 것들은 목표가 아니라 수반되는 결과물이 될 때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파종을 할 때는 파종에 집중하고, 잡초 제거를 할 때는 잡초 제거에 집중하며, 그렇게 매 순간에 충실할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그해의 수확물을 거둘 때는 또 수확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활의 목적도 과녁이 아니라 활을 쏘는 그 행위 자체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 그 행위에 온전히 집중했을 때 기의 순환을 느끼고 물아일체의 경지를 경험하든, 과녁을 땅땅 맞히든, 그것은 다 부차적인 결과물이다. 활을 쏠 때 우리는 활을 쏘는 나 자신에 집중해야 한다. 그게 활쏘기의 본질이고 목적이다.


타로 카드에 등장하는 4가지 원소인 완드, 컵, 소드, 펜타클은 과거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4가지 관점을 보여준다. 완드는 개인의 신념이고 가치관이라면, 소드는 그것을 세상에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식이자 논리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타로 카드는 길게 뻗은 것이 닮은 나무 막대인 완드와 날카롭게 벼려진 칼자루로 나타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은 시간이 흐르며 내려놓지 못하는 아집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원소의 여정이 흥미롭다. 첫 출발점이자 모든 가능성이 잠재된 에이스 카드에서 그것이 세상에 나타나 변모하는 과정의 끝에서 처음 잠재성의 단계에서 느껴지던 에너지가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드로 가득한 카드 속 인물의 표정에서 우리는 신념이 아닌 고집을 느낀다. 소드에 둘러싸인 인물의 모습에서 기술이나 이론 그 자체에만 천착할 때 겪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남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하는 기술과 지식은 그 끝이 명확하다


특정 자세가 옳다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은 아집이 된다. 맞히는 기술에만 집착하여 자세도, 활을 쏘는 철학도 없이 백발 백중하는 사람이 되면 끝내 공허해진다. 처음 배우던 올바른 자세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신이 활을 배우려 했던 초심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백발백중하는 궁사는 얼마든지 또 나온다. 그때 그와 자신이 무엇이 다른지 대답할 수 없다면 어느 순간 활도 과녁도 모두 잃고 말 것이다. 궁사는 오직 매순간에 충실함으로써 아집에서도, 몰개성에 빠진 경쟁에서도 빠져나와 자신만의 무엇을 찾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단單'이라는 한자가 있다.


불필요한 것을 모조리 버리고 핵심만 남겨놓는 것을 일컫는다('단남'의 단을 저걸로 바꿀까 생각 중이다). 이지훈 세종대 경영학 교수는 같은 한자를 쓰는 제목의 그의 저서 <단>에서 그것은 '더는 뺄 것이 없는 궁극의 경지'라고 했다. 나는 불순물을 걷어낸 그러한 경지를 활을 쏘는 매 순간에 다만 충실함으로써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확신을 담아 하나의 명제로 적지 못하고 짐작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직접 경험치 못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진리가 될 수 없기에.  


다시 돌아와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보자면 단지 피곤해서도 아니고 일이 많거나 적어서도아닌 거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꾸 시작도 전에 생각이 많아져서다.


많은 일을 처리할 정신없는 하루를 상상하며 시작도 전에 압박감을 만들어 내고, 일이 없는 하루엔 다가올 막막함을 떠올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애써 기상을 미룰 때는 이래도 되나 하는 불안함이 나를 짓누른다. 생각이 만든 무게는 벤치프레스보다도 더 무겁다.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하루를 그냥 열어젖히자. 이불을 뒤집어써버렸다면 다만 그 포근함이 자아내는 느낌에 젖어들자. 그렇게 일상에서부터 순간에 머무는 연습을 해보자. 그게 나를 더 나은 궁사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란 '기대'로 변모하는 것마저도 적당히 경계하면서.






활을 배우고 처음으로 과녁(30m)을 맞히던 순간을 기억하며



이전 23화 활은 거울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