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May 16. 2024

누구에게나 한 번쯤 '그분'이 찾아온다

짝꿍의 초몰기


‘와아-!!’

 

하늘 높이 날아오른 마지막 화살이 과녁에 닿았다는 신호등이 점멸하는 순간 사대에는 축하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활을 함께 배운 내 짝꿍이 집궁 2년 반 만에 드디어 초몰기*를 했다.

 

*한 순(5발)을 쏴서 모두 맞히는 '몰기'를 처음으로 한 것. 초몰기 아후 비로소 어엿한 궁사라는 의미로 ‘접장’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

 

우리 활터만의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몰기는 ‘그분’이 오신 날에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의 초몰기가 그러했고, 나뿐만 아니라 활터의 많은 접장님들이 입을 모아 자신이 경험한 그분과의 조우가 마치 간증처럼 넘쳐난다. 그분께서 이번엔 나의 짝꿍에게 임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했던가. 갑진(甲辰年)년 기사월(己巳月) 기묘일(己卯日). 정말이지 기상천외하고도 기묘한 날이었다. 5월마다 찾아오는 스승의 날이 묘하게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의 스승 역할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탄신일과 겹친 날. 짝꿍에게는 명리학에서 말하는 ‘천을귀인’이 두 개나 임하여 각자가 합(合)으로 탄탄히 고정된 날.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기운을 짝꿍의 기량으로 능히 감당해 내는 식신제살(食神制殺)의 형국이 조성된 날이기도 하다.

 

초몰기 하루 전날, 여느 때처럼 일주일 중 가장 힘들다는 하루를 보내고 와서 녹초가 된 그녀는 하필이면 식사도 부실했던 터라 야식을 먹을까 했었다. 그녀를 위해 간단한 야식을 준비해 줄 요량이었는데 웬걸, 그녀가 우리 집 1층까지 왔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왠지 당기지가 않았고 먹으면 다음날 오전에 활 쏘러 가려던 계획이 무산될 것만 같았단다.

 


다음 날 오전, 활터에 갈 때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계속 일어났다. 그날따라 자신이 요즘 활터 갈 때 같은 옷만 입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전에 함께 커플로 맞췄었던 활터용 개량한복을 입었다. 마침 그날 날씨가 그 옷을 입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심 내가 같은 옷을 입고 오지 않길 바랐다. 그날은 어쩐지 자신이 개량한복으로 인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싶었다나. 다행히 나는 평상복을 입고 나왔다. 덕분에 그녀는 얼마 후 있을 초몰기 이후에 우리 활 궁사에 아주 적합한 모습으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초몰기 직후 기념사진


활을 내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당연히 몰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의 최근 평균 기록은 5발을 쏘면 1발을 맞을까 말까 했었고, 어떤 날은 6순(30발)을 냈는데도 총 관중 수가 2발에 그치는 날도 허다했으니까. 그나마 요즘 날씨가 좋아서 부지런히 나간 덕분인지 이따금씩 2~3발씩도 맞히는 순간들이 있었고, 최근에는 4발도 맞힌 적도 생겨나면서 미묘하게 상승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나름 느끼고 있었을 따름이다.

 

첫 순은 5발 중 2발을 과녁에 맞혔다. 요 근래의 기세 그대로였다. 몰기를 하기엔 살짝 부족한. 그런데 바로 그다음 순에 한 발, 두 발 맞히더니 이내 세발까지 연달아 맞기 시작하자, 이때부터 함께 사대에 서 계시던 다른 접장님들이 잡담을 뚝 그치고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네 번째 화살마저도 맞고 말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마지막 발시에 주목했다. 아쉽게도 살짝 옆으로 빠졌다. 당사자보다도 안타까워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짝꿍은 수줍은 듯 웃었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 순을 내고 화살을 주워왔다. 새롭게 시작된 첫 번째 순, 이번엔 그녀 옆에 평소에 몰기를 자주 하시는 L접장님이 나란히 섰다. 짝꿍의 화살이 다시금 과녁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하나둘씩 가서 맞기 시작했다. 옆에 서신 L 접장님도 그녀의 리드(?)에 여유롭게 응수했다. 정말 부처님이라도 오셨던 것일까, 이번에도 그녀는 4발을 연이어 맞혔다. 이번엔 사람들이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했다. 부처님 힘을 빌려서 쏘는 건 반칙이라며 자기 실력으로 쏘라셨다. 긴장을 풀어줄 요량이었다. L접장님도 지금 너무 숨 막힌다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초몰기를 하던 순간이 오버랩됐다. 당시 나도 첫 번째로 네발을 맞힌 후 모두가 숨 죽이고 지켜보는 게 느껴진 탓에 긴장해서 마지막 발을 놓쳤었다. 그날이 아닌가 싶었는데 곧바로 ‘그분’의 아량(?)으로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접장님들이 가벼운 농담으로 긴장을 해소해 주셨고, 나는 덕분에 초몰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긴장 속에 차분히 미소를 지으며 화살을 한가득 당기는 나의 짝꿍을 바라봤다. 흔들림이 없이 편안한 것이 A모사 침대 광고 카피를 연상케 했다. 쏘기도 전에 보이는 폼과 느껴지는 기세에서 저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이미 밝혔듯, 명중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평소 같았다면 사람도 얼마 없어서 이 기쁜 소식이 늦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부처님 덕분에 마련된 공휴일에 활터엔 그녀의 승전(?) 소식을 축하해 줄 충분한 수의 접장님들이 계셨다.


여기저기에서 축하의 덕담이 쏟아졌다. 어쩜 몰기 할 줄 알고 옷도 딱맞게 차려입고 왔느냐, 36파운드(여성은 40~45, 남성은 45~50 파운드의 활을 보통 쓴다) 가벼운 활로 정말 대단하다, 요즘 자주 나오더니 드디어 해냈구나 등등. 짝꿍의 얼굴은 기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홍당무색이 되어버렸다.  나는 옆에서 계속 입이 귀에 걸려 내려오질 않아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더 놀라운 건 꺾이지 않은 그녀의 기세였다. 보통 첫 몰기 후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들떠서 바로 다음 순에는 기세가 꺾이기 마련이다. 나는 첫 몰기 직후에 5발 다 맞히지 못하는 굴욕(?)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녀는 또 4발을 맞혀버렸다. 옆에 계신 L접장님은 또 연이은 몰기를 거뜬히 하셨고. 이날 나의 짝꿍은 총 6순(30발)중에 총 20발을 맞히는 기염을 토했다. 5발 중 평균 3발을 넘게 맞힌 기록이었다.


지금봐도 믿기지 않는 그날의 기록


30발을 쏴서 2발을 맞히던 것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그녀가 요 근래에 꾸준히 나오며 점점 실력이 상승하는 와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농담처럼 말하는 ‘그분’이라는 것이 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있어 보이게 말하면 ‘운(運)’이라는 존재일 테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돌이켜보며 근원에 근원으로 소급해 나가다 보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우연처럼 보이던 수많은 필연들이 겹치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우리가 그것을 우연인 줄로만 알 뿐.

 

그분이 임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대운(大運)’과도 같이 어떤 커다란 운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순풍에 돛 단 듯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그런 시기들이 누구에게나 삶에서 한 번은 찾아온다. 혹자는 결혼 후, 혹자는 퇴사 후, 혹자는 이사 후에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진다.

 

무엇이 원인이라고 콕 집어서 독립변수를 말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애초에 삶에 독립변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실험실과는 다르기에. 분명한 건 우리는 태어났고, 언젠간 죽는다는 것. 그처럼 고정불변한 것은 없고 만물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상승운이 있으면 하락운도 존재한다. 몰기 후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하락세를 맞이한다. 내가 초몰기 후 다음 순은 한 발도 못 맞혔던 것처럼, 누군가는 아예 장기적인 슬럼프를 겪기도 한다. 이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정점을 찍은 이후에 남은 것은 내려오는 일밖에 없다. 우리는 정상에 오래 머무르는 방법보다 우아하게 내려오는 법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빛날 수만은 없다.


평소 활을 낼 때 6순씩만 내는 그녀는 그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3순을 더 낼까 하다가 이내 활을 정리했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기 위해. 신기하게도 화창하던 날씨가 점점 흐려지고 바람이 거세어지더니 오후엔 밤까지 이어지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초몰기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대학원 과제로 고통을 받으며 이따금씩 자신이 몰기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다가 다시 고통의 늪으로 끌려들어 가기를 반복했다. 아마 그녀가 못 참고 세 순을 더 냈다면 종일 이어지던 과제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게 해 주던 초몰기의 달콤함이 상당 부분 감소했으리라.

 

똑같은 몰기여도 그녀처럼 마른 팔로, 가벼운 활로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래서 나의 짝꿍이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이뤄낸 결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그런 그녀가 참으로 멋지다. 이 날의 기억은 나의 초몰기때의 기억만큼이나 오래 남을 것 같다.

 

짝꿍 또한 그러길 바란다. 오늘의 기억이 그녀의 마음속 안식처의 단단한 한 부분을 차지하길 바란다. 살다가 한 번씩 너무나 힘에 부칠 때가 올 때면, 오늘 자신이 해냈던 초몰기의 감각을 떠올리길 바란다.


과제의 고통 속에서도 잠시나마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했듯이. 어떤 인생이든 나를 웃게 하는 존재, 혹은 그런 기억이 있으면 충분히 살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활 쏘는 자태가 아름다운 짝꿍의 뒷모습


이전 24화 활쏘기의 목적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