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는 이의 마음을 비추는
'관덕(觀德)'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덕을 드러내어 보인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덕행을 살피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때의 관덕은 활쏘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마치 불혹이나 지천명과 같이 나이를 달리 가리키는 한자어가 있는 것처럼. 누군가 활 쏘는 폼만 보아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그 관덕이란 말을 여실히 실감하는 중이다. 어느덧 햇수로만 2년이 넘었거늘 아직도 내 활쏘기는 오리무중이다.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활을 들고 천천히, 가득 당기어 잠시 그 순간에 머무른 뒤, 이내 과녁까지 힘차게 날려 보내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도 한 두 가지씩 놓치는 게 꼭 생긴다.
하체에 신경을 쓰면 상체를 잊고, 상체를 신경을 쓰면 하체를 놓친다. 줌손(활을 쥐는 손)을 신경을 쓰면, 깍짓손(시위를 당기는 손)을 놓친다. 어쭙잖게 당기면 만작(화살 길이만큼 부족함 없이 충분히 당기는 것)이 안 되고, 억지로 만작을 하려고 무리를 하면 자세가 무너진다.
아-!
체면을 차린답시고 차마 입밖으론 내뱉지 못하는 짜증 섞인 탄식이 가슴속에서만 고요히 메아리친다. 내 활쏘기는 여전히 거시적 관점에서의 물 흐르듯 흐르지 못하고 분절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둘씩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에 반복적,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면 무기력 그 자체가 기본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나의 경우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낙전'이 자꾸만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낙전은 화살이 고정되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져 버리는 현상으로, 낙전이 되면서 발시를 할 경우 사고의 위험이 있다. 나의 경우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상태라 여러 짐작만을 가설로 세워 검증을 거듭해 나가고 있을 뿐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아찔했던 순간들도 꽤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활을 쏠 땐 아직도 마음 한편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다. 이미 이 감정을 마치 벗 삼아 함께 지낸 지가 오래다.
관덕이라는 그 말, 참 잘 만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활은 실로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다. 어떤 날은 그날따라 만작이 잘 되지 않아 그것에만 천착하던 때가 있었다. 화살촉이 가득 당겨져 그 상태로 머물다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앞뒤로 춤을 췄다. 만작 여부를 확인코자 화살촉만 눈이 뚫어져라 보다 보니 내 마음도 그에 맞춰 요동치며 춤을 춘다. 마음의 고요함을 잃으니 내 화살도 제 갈 길을 놓친다. 내 불안함과 두려움이 화살에도 실린 것이다.
불행(?)은 한 번에 온다고, 하필이면 그날따라 내 옆에 외부에서 오신 접장님 한 분이 계셨는데 발시 때마다 자꾸 화살이 활을 치고 나가서 듣기 불편한 소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소리 자체에도 신경이 거슬렸지만, 왜 저렇게 소리가 나는데도 시정하지 않는 것인지 그 무심함이 답답하여 더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런 짜증을 느낄 자격이 있었을까? 나 조차도 만작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해도 곧바로 고쳐지지가 않고 있던 것을. 결국 나는 나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남에게 투영하고 있었던 거다. 그 모든 내 마음의 요동침에 대해 활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과녁을 향해 일렬로 날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좌우로 흩날리는 화살을 통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만작을 하는 이유를 헤아리는 게 아니라 만작이 된 상태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할 것은 기운을 가득 실어 활을 당기고 줌손은 튼튼히 버텨주며 깍짓손은 지긋이 당기는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어쩌면 내 몸에 비해 화살이 긴 것일지도 모르고, 내 전반적인 자세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예전엔 되던 만작이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전체적인 관찰은 하지도 않은 채 만작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 춤추는 화살촉만 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 말이다.
찰나였지만 잠시 정리가 된 마음 상태는 잠시나마 나에게 평온함을 선사했고, 그때 화살을 보낼 때 손에 느껴지던 감각은 확실히 그 직전까지 머리를 싸매며 전전긍긍하던 마음으로 날려 보낸 화살이 주던 느낌과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었다. 결과는 어김없이 관중. 심신의 안녕이 이뤄진 상태에서 나간 화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활쏘기는 곧 관덕이다.
인간적 됨됨이는 어떻게 사회적 가면이라도 써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지만(어차피 이 또한 다 티는 나기 마련이니) 활쏘기는 꾸며낼 수가 없다. 마치 타로 카드나 주역 괘를 뽑으면 내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활 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언행이 일치된 삶, 지행이 합일이 된 삶을 살고 싶다.
활을 통해 마음을 단련하고자 했지만, 어쩌면 활은 그저 단련된 그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줄 뿐인 것일지도 모른다. 심신의 수양은 오롯이 내 몫이다. 활쏘기가 나를 단련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관덕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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