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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02. 2024

활은 거울이다

쏘는 이의 마음을 비추는


'관덕(觀德)'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덕을 드러내어 보인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덕행을 살피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때의 관덕은 활쏘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마치 불혹이나 지천명과 같이 나이를 달리 가리키는 한자어가 있는 것처럼. 누군가 활 쏘는 폼만 보아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950년대의 북한 <관덕정>의 모습 (프랑스 사진작가 Chris Marker)

요즘 그 관덕이란 말을 여실히 실감하는 중이다. 어느덧 햇수로만 2년이 넘었거늘 아직도 내 활쏘기는 오리무중이다.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활을 들고 천천히, 가득 당기어 잠시 그 순간에 머무른 뒤, 이내 과녁까지 힘차게 날려 보내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도 한 두 가지씩 놓치는 게 꼭 생긴다.


하체에 신경을 쓰면 상체를 잊고, 상체를 신경을 쓰면 하체를 놓친다. 줌손(활을 쥐는 손)을 신경을 쓰면, 깍짓손(시위를 당기는 손)을 놓친다. 어쭙잖게 당기면 만작(화살 길이만큼 부족함 없이 충분히 당기는 것)이 안 되고, 억지로 만작을 하려고 무리를 하면 자세가 무너진다.


아-!


체면을 차린답시고 차마 입밖으론 내뱉지 못하는 짜증 섞인 탄식이 가슴속에서만 고요히 메아리친다. 내 활쏘기는 여전히 거시적 관점에서의 물 흐르듯 흐르지 못하고 분절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둘씩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에 반복적,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면 무기력 그 자체가 기본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나의 경우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낙전'이 자꾸만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당기는 중에 저러면 그나마 나은데 발시 순간에 저러면 위험하다


낙전은 화살이 고정되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져 버리는 현상으로, 낙전이 되면서 발시를 할 경우 사고의 위험이 있다. 나의 경우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상태라 여러 짐작만을 가설로 세워 검증을 거듭해 나가고 있을 뿐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아찔했던 순간들도 꽤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활을 쏠 땐 아직도 마음 한편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다. 이미 이 감정을 마치 벗 삼아 함께 지낸 지가 오래다.


관덕이라는 그 말, 참 잘 만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활은 실로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다. 어떤 날은 그날따라 만작이 잘 되지 않아 그것에만 천착하던 때가 있었다. 화살촉이 가득 당겨져 그 상태로 머물다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앞뒤로 춤을 췄다. 만작 여부를 확인코자 화살촉만 눈이 뚫어져라 보다 보니 내 마음도 그에 맞춰 요동치며 춤을 춘다. 마음의 고요함을 잃으니 내 화살도 제 갈 길을 놓친다. 내 불안함과 두려움이 화살에도 실린 것이다.


불행(?)은 한 번에 온다고, 하필이면 그날따라 내 옆에 외부에서 오신 접장님 한 분이 계셨는데 발시 때마다 자꾸 화살이 활을 치고 나가서 듣기 불편한 소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소리 자체에도 신경이 거슬렸지만, 왜 저렇게 소리가 나는데도 시정하지 않는 것인지 그 무심함이 답답하여 더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런 짜증을 느낄 자격이 있었을까? 나 조차도 만작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해도 곧바로 고쳐지지가 않고 있던 것을. 결국 나는 나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남에게 투영하고 있었던 거다. 그 모든 내 마음의 요동침에 대해 활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과녁을 향해 일렬로 날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좌우로 흩날리는 화살을 통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만작을 하는 이유를 헤아리는 게 아니라 만작이 된 상태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할 것은 기운을 가득 실어 활을 당기고 줌손은 튼튼히 버텨주며 깍짓손은 지긋이 당기는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어쩌면 내 몸에 비해 화살이 긴 것일지도 모르고, 내 전반적인 자세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예전엔 되던 만작이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전체적인 관찰은 하지도 않은 채 만작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 춤추는 화살촉만 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 말이다.


찰나였지만 잠시 정리가 된 마음 상태는 잠시나마 나에게 평온함을 선사했고, 그때 화살을 보낼 때 손에 느껴지던 감각은 확실히 그 직전까지 머리를 싸매며 전전긍긍하던 마음으로 날려 보낸 화살이 주던 느낌과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었다. 결과는 어김없이 관중. 심신의 안녕이 이뤄진 상태에서 나간 화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활쏘기는 곧 관덕이다.


인간적 됨됨이는 어떻게 사회적 가면이라도 써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지만(어차피 이 또한 다 티는 나기 마련이니) 활쏘기는 꾸며낼 수가 없다. 마치 타로 카드나 주역 괘를 뽑으면 내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활 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언행이 일치된 삶, 지행이 합일이 된 삶을 살고 싶다.

활을 통해 마음을 단련하고자 했지만, 어쩌면 활은 그저 단련된 그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줄 뿐인 것일지도 모른다. 심신의 수양은 오롯이 내 몫이다. 활쏘기가 나를 단련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관덕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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