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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18. 2024

활을 쏘며 삼재(三材)를 논하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법

지난 주말에 날이 너무 좋아서 활을 내고 왔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아침부터 사람들이 평소보다도 더 많은 것이 봄날을 만끽해야겠단 생각을 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활을 세 순 내고 화살을 회수하러 다 같이 걸어가는데 그 행렬이 제법 길다. 평일과는 다른 활기찬 기운이 내 몸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진다.


어느 봄날, 화살을 주우러 가는 궁사들의 행렬


그런데 화살을 주우러 가지 않고 쭈그려 앉아 뭔가를 뽑고 계신 접장님들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달래를 캐고 계셨다. 심어 두신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자라난 것이란다. '식물 까막눈'인 나는 바로 눈앞에 달래가 있어도 못 알아보고 지나쳤을 텐데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금방 그 귀한 자연의 선물을 알아보신다.


삼인성호라고 했던가. 세 사람이 말하면 거짓도 진실처럼 호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날은 '진짜' 달래가 있었다. 어느 순간 달래를 캐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덧 자기 화살은 동행한 다른 이에게 부탁하고 달래를 캐시는데 집중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벌써 3번째 맞는 봄이지만 달래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 화살 줍다 말고 갑자기 작물을 수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달래 캐는 궁사들 (2024, 천마정)


봄날에 만난 뜻밖의 선물에 사람들의 입가엔 함박미소가 가득하다. 농부도 구경꾼도 모두가 신기해하며 봄처럼 밝게 웃는다. 손에 흙 묻은 달래를 한 아름 쥐고 온 궁사들이 하나둘씩 도착하자 진한 향이 활터 내부를 가득 채운다.


'오늘 저녁은 달래장이다!'


몇몇 분들이 집에 가져갈 달래를 주섬주섬 비닐 봉다리에 포장하며 저녁 메뉴를 예고하신다. 오늘 캔 것만 해도 활터 하루 이용료 뽕은 뽑고도 남으신다. 사람들이 달래를 캐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왜 내 기분이 다 좋아졌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자연 속에 존재한다는 어떤 일체감 같은 것이 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반찬은 달래장이다


활터에서 자연과의 묘한 일체감을 경험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 활의 전통 사법을 배우기 위해 한동안 자주 찾았던 청주의 활터에 가면 이상하게도 내가 현재 속해 있는 활터보다도 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곤 한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든든함도 한몫하겠지만,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이곳에서는 유독 더 많이 느낀다.


하루는 그곳에서 활을 내면서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디선가 고라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사대와 과녁 한가운데에 떡 하니 서서 잠시동안 우리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때 그 고라니와 눈이 마주친 1초 남짓이나 될까 모르는 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멈춘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임무(?)를 마친 것인지 고라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내 총총 숲으로 사라졌다.


고라니를 만났던 장수바위터 (청주 공군사관학교 소재)


활터 속엔 자연이 있다. 정확히는 활터가 자연을 품은 게 아니라 자연이 활터를 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제주 서귀포시의 백록정에는 현무암이 보이는 해변가를 옆에 두고 활을 내는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시원한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활을 낸다면 그곳이 무릉도원이 아니고 무엇일까.


통영의 한산정도 빼놓을 수는 없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즐겨했던 곳으로 과녁과 사대 사이에 바다가 가로지르고 있는 멋진 경관을 자아내는 곳이다. 이충무공이 한산도 제승당을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은 1593년 7월 이후 활쏘기를 연마하고 부하 장수들을 훈련시킨 곳이라고 한다. 문화재 보존과 관광객 보호를 이유로 한산정에서는 일반 궁사들의 활쏘기는 금지가 되어있다. 언젠가 이곳에서 바다를 너머로 화살을 날려볼 기회가 닿기를 고대한다.


이밖에도 멋진 풍경 속에 자리 잡은 활터는 많이 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녹아들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값진 경험이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서 활을 내든 그 풍경 속에 나 자신을 녹여낼 줄 아는 능력이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서있는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자연 속에 하나가 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활을 쏘기 위해 시위를 가득 당길 때 가장 먼저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지그시 누른다. 호흡은 당기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들이마신다. 활이 가득 당겨질 때즈음엔 엄지발가락에서 출발한 기의 흐름이 하체를 가득 채워 속칭 동구녕까지 단단해지고, 호흡을 머금은 단전은 이내 팽팽해진다.


위쪽에서는 정수리 쪽의 백회혈 또는 정수리 차크라라고 하는 곳에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이 양팔과 손끝을 지나 척추를 타고 역시 단전에 도달한다. 아직 한참 부족한 경지이지만, 이때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멋진 순간이 아닐까 한다. 활쏘기는 천기와 지기가 인간 안에 맺히는 과정을 통해 천지인 삼재의 합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행위 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머금은 활터에서 활을 쏘는 궁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천지인합일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뿐 결코 그것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아님을, 나라는 개인은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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