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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11. 2024

왜 활을 쏘는가

초심을 논하다

벚꽃과 궁사


무엇을 하든 이유가 중요했다.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그냥 하라면 해!', '그냥 외워!', '다들 그러고 사는 거야.'와 같은 류의 말들이다. 스스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이 정해주고 세상이 정해주는 어떤 '정답'에 곧이곧대로 복종하라는 각종 언행들. 또는 그런 시류를 만들어내는 앵무새 같은 사람들(사람 같은 앵무새가 더 맞겠다).



왜 활을 쏘는가? 그 이유는 궁사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활을 처음 배우게 만든 계기가 파울로 코엘료가 쓴 <아처 Acher>라는 책이었다. 활에 작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담아 말하는 내용에 매료된 것이다. 내게 있어 활은 심신 수양의 도구요,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되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게 내가 활에 입문한 계기였으며, 활을 대하는 나의 초심인 셈이다.




초심初心이 향기를 발하는 데는 그것의 굳건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초심은 무엇인가의 시작과 지속, 그리고 결실까지 줄곧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러한 한 사이클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초심을 지닌 자에게 영감을 주는 기저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휘청이는 초심은 그만큼 정처 없는 여정을, 내실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초심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별개로 반드시 뭔가를 시작하는 초두에 그 이유를 완벽하게 정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초심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초심을 대하는 태도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고자 했던 그 이유를, 그 마음을 떠올리고 헤아려보는 태도. 결국 초심은 부단한 자기 대화에서 비롯되고, 또 유지된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물어보자, 자기 자신에게. 활을 왜 쏘는가? 왜 나는 활을 배우고자 했던가?


활을 배우는 대부분의 연령대가 중년 이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당수가 '건강', '양생' 등을 이유로 꼽을 것이다. 당기는 데 힘도 제법 들고, 과녁까지 화살을 주우러 가는 길에 자연스레 걷기 운동도 되니 말이다.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추 세워 바른 자세로 활을 쏘다 보면 몸도 마음도 더 올곧게 변할 것 같은 건 덤이다.


젊은 층은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그냥 재밌어 보이니까. 저렇게 멀리 있는 과녁을 맞힐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하기만 하다. 한 발이라도 맞힌다면 너무나도 기쁘고 뿌듯할 것만 같다. 좀 안 맞으면 어떤가, 맞힐 때의 쾌감이 너무 커서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을 것만 같다.


활을 배우고 세월이 제법 지난 이후에 (다행히 아직도 활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다시 물어보자. 왜 활을 쏘는가?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것이 언제가 마지막인가? 생각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활터에는 사람을 홀려 초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욕이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


과녁을 많이 맞히는 사람은 박수갈채와 선망의 대상이 된다. 각종 대회를 휩쓸기도 하고, 승단대회에 다가 입단을 하여 그 증표로 '무궁화'가 박힌 궁대를 매고 다니기도 한다.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같지만, 과녁을 얼마나 맞히고 무궁화를 얼마나 보유했느냐에 따라 나의 말에 실리는 무게가 달라지니 자신이 스스로를 여기는 마음가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럴 만도 하다.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가. 매일 나가서 활을 쏘았고, 바람의 저항을 이기기 위해 더 강한 활로 바꿨다. 어깨와 엘보에 무리가 올 때도 있었으나 각종 보호대와 파스가 있으니 괜찮다. 옆 동기는 트리거 증후군으로 수술도 했다더라. 부상 없는 운동이 어디 있겠나, 다들 그러고 사는 거지.


그런데, 가만. 내가 왜 활을 배우려고 했더라? 문득 초심을 떠올려본다. 그래, '건강'이었지 참. 퇴직 이후 아내와 함께 활을 쏘며 둘이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천천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심신을 돌보기 위해 활을 배우고자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심신의 건강이 머물고자 했던 자리엔 야망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머물고자 했던 자리엔 승부욕과 조바심이 들어와 앉아있었다. 내 열정에 지친 아내는 활터에 같이 나가는 횟수가 줄어든 지 오래다.


이번엔 재미를 추구하고자 했던 젊은 궁사를 살펴보자. 과녁에 몇 발 맞을 때는 맞히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내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잘 맞히는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아진다. 어쩌다 한 두발씩 맞는 순간은 존재했지만, 맞힌 화살보다 맞히지 못한 화살만이 기억에 남는다.


재미를 느끼러 활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늘 맞히는 기쁨보다 못 맞히는 것에 대한 자책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배우기 전엔 한 발만 맞아도 그렇게 좋을 것만 같더니. 이젠 그렇지 않다.


중년의 궁사와 젊은 궁사를 가정했지만 내 안에도 저러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아닌 척해도 속에는 돋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언제나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그 마음을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스스로 설정한 활을 배우려 했던 첫 마음, 그 초심이 나의 욕망에 의해 퇴색되지 않도록 하고 싶을 따름이다. 매일 난을 가꾸는 마음처럼 그렇게 초심을 떠올리고 싶다.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날마다 활을 대하면
한 발 한 발이 자신의 완성을 위한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 반대이면 한 발 한 발이 스트레스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온깍지총서 <전통 활쏘기> 중에서


이렇듯 초심은 우리가 기르는 식물과도 같은 듯하다. 물을 주고 보살펴야 하는 정성은 저마다 상이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의 존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이따금씩 자신의 초심을 떠올리는 것은 궁사 각 개인이 설정한 활의 길에 주요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자신만의 이유가 없으면 그것이 활이든 다른 무엇이든 방향성을 잃게 되며 끝내는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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