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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25. 2024

날려 보내야 할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과녁을 대하는 마음가짐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공평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호흡이다. 누구나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을. 호흡(呼吸)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살펴보면 '숨 내쉴 호'에 '숨 들이쉴 흡' 자를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내뱉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그만큼 들이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들이마신 숨을 더 이상 내뱉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비워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그만큼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활을 가득 당기고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기 전까지 강하게 붙들고 있는 건 활과 화살뿐만이 아니다. 바로 과녁을 맞히고야 말겠다는 강한 욕망, 경우에 따라선 집착에 가까울 만큼 커지기도 하는 그 욕망도 함께 붙들고 있게 된다. 무서운 점은 활시위를 손에서 놓는 순간 화살은 우리를 떠나 날아가지만, 그 마음만은 떠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발시 직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 의식의 초점이 맺히는 대신, 날아가는 화살이 과녁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에만 온갖 신경이 쏠리게 만든다. 맞히면 잘 쏜 것이고, 맞지 않으면 잘 못 쏜 것이다. 과정은 아무래도 좋고 결과에만 주목한다. 화살을 보내는 순간 자신의 몸 전체에 작용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육체 너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의 작용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인식은 추호도 없다.


잘 맞는 날은 그만큼 더 욕심이 나니까 눈이 빠져라 과녁만을 바라보고, 잘 맞지 않는 날은 그만큼 더 조바심과 스트레스가 쌓여 과녁에 천착하게 된다. 잘 맞아도 힘들고, 잘 맞지 않아도 힘들다. 나 혼자만의 일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내 옆에서 같이 활을 내는 다른 분이 잘 맞고 안 맞고에 따라 사대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잘 맞는데 옆 사람이 잘 맞지 않으면 괜스레 눈치를 보게 되고, 옆 사람은 쏘는 족족 과녁을 맞히는데 내 화살은, 맞는 건 둘째치고 어디 소풍이라도 가버린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조차 보이지 않을 때 속에선 울화가 치밀 때가 있다.


가뜩이나 안 맞아 열받는데 그나마 찍힌 관중 모양도 마치 엿(?)을 연상케 한다^^



'도대체 왜 안 맞는 거야?'



이 질문에 들어간 '왜'는 장식일 뿐이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맞지 않았다는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속 좁은 궁사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더 가깝다. 진짜 왜 맞지 않았는지를 궁구하는 궁사는 결코 냉철함과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바람이나 습도 등의 외부 요건만을 탓하지도 않는다. 활을 들어 올리는 순간부터 시위를 가득 당기고 화살을 날려 보내는 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쏘임새에 문제가 없었는지만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볼 따름이다. 외부 요건에 대한 고려는 스스로의 쏘임새에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든 다음의 문제다. 나를 살피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불평불만, 상황 탓 환경 탓만 하고 있다가는 나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어느새 자시 내 차례가 와버리기에.


그렇게 마음과 씨름을 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문득 알아차릴 때가 있다. 그럴 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혼자 겸연쩍음을 느낀다. 이내 나의 마음속에 과녁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 차 물 먹은 솜처럼 묵직하고 답답한 상태가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성급히 들어 올리려던 활을 잠시 내려놓고 호흡을 한번 가볍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그리고 깊게 내뱉는다.


 '후-'


화살에 실려 날려 보냈어야 할 욕심들을 뒤늦게 호흡에나마 실어 녹여내 본다.


맞히고 싶은 마음 자체가 잘못인 건 아니다.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을 바라보는 순간 그 마음이 절로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정말 과녁을 맞히고자 하는 마음 추호도 없다면 '주살질(과녁을 보지 않고 줄을 매단 화살을 쏘며 자세 연습에 집중하는 것)'만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주살질

그러나 그 마음은 날아가는 화살과 함께 매번 비워져야 한다. 화살을 가득 당길 때 들이마시는 호흡으로 단전에 기운을 한가득 채운다. 찰나와 같은 시간이지만 이때 온몸이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그에 따라 과녁에 대한 마음도 최고조가 된다. 화살을 날려 보내고 이내 몸이 이완 상태가 될 때 마음도 함께 이완되어야 한다. 과녁을 향해 날아간 화살이 활에 남긴 빈 공간처럼 마음은 텅 빈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 텅 비워진 마음을 만들 때 비로소 활쏘기가 주는 신묘한 매력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날려 보내야 할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철학자 앨런 와츠의 <불안이 주는 지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삶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우주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음을 자인할 때 비로소 '우주의 신비'를 알 수 있다.


그는 무엇인가에 대해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되려 불행에 더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안정에 대한 열망은 그 자체가 고통이요 모순이며, 안정은 추구하면 할수록 고통만 더욱더 심화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말한다. 영원한 삶은, '나'와 '지금' 사이의 마지막 경계선이 사라졌을 때, 다시 말해 단지 '지금'만이 존재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이런 마음이라면 나 역시 언젠가 과녁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는 과녁에 대한 마음마저도 나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는 것에 가까울 테다. 과녁에 대한 집착은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하면 코끼리 한 부대가 머릿속에 나타나 연신 뱃고동 소리를 ‘뿌우-’ 하고 내듯이.


과녁을 향한 지독한 이 집요를 원동력 삼아 활과 화살을 들어 올린다. 활을 그득하니 당겨서 가득 차오른 그것과 내가 하나가 될 때 '나'를 잊는 무아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내 비워낸다. 그리고 다시 채우고, 또 비우고. 낮과 밤처럼, 순환하는 계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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