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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03. 2024

甲辰年 己巳月 다섯 번째 기록

[주간단남] 5월 5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5.27.(월) 


(..)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가지 않겠다. 나를 '원하는' 곳에 갈 시간도 부족하다.

내가 정의한 필요는 '도구'로서의 필요다. 원한다는 건 '존재'로서의 원함이다.

전자는 나의 배경, 직업, 능력, 구색, 명분 등 나 자체가 아닌 나의 배경/기능을 요구한다. 후자는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를 원한다. 

적어도 '인간적인' 관계에서는 후자를 지향해야 한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목적의 8할 이상이 후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관계에 나는 존재로서 존중받지 못함을 느낀다. 이건 내가 상대를 도구로써 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때 새삼 깨달았다. 짜증은 세상이 나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태도를 가질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짜증이나 분노, 언짢음은 내 이기심과 내 에고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말이다.

그릇이 보다 커졌을 때는 개인적 이슈가 아닌 대의를 위한 분노가 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보다 그릇이 커진다면야 그마저도 흘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나를 내려놓지 못해서 짜증이 나는 것이다.




24.05.28.(화)


(..)

<절제의 성공학>을 오랜만에 꺼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세상에 각자에게 할당된 쾌락의 몫이 정해져 있다면 방탕하게 그것에 탐닉하기보다 적절히 조절하며 다른 영역에서 그것을 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침 내 연인도 절제하면 복이 온다는 명제를 주창(?) 하는 중이니 둘이서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기에도 좋겠다.

(..)

타로보다 사주를 봐주는 게 훨씬 더 부담스럽다. 사주가 타로에 비해 진입장벽이 더 높고 어렵고 복잡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것이 어느 정도 선천성을 띠는 운명을 다루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그런 것에 대해 논한다는 게, 그것도 나 자신의 삶도 아니고 타인의 삶을 말이다, 부담이 안 생길 수가 없다. 한편으론 부담이 생겨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타인의 삶이니만큼 신중하게,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좋은 말만 맹목적으로 해주라는 게 아니라 최대한 내 개인의 사견은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거의 정해지다시피 했던 과거에는 예단적 상담이, 아니 그것을 상담이라 하지도 않았겠지, 주를 이루었겠지만 현대사회는 워낙 변동성이 크고 후천적 변수의 작용이 커졌기 때문에 숙명론적 관점을 가져선 안 된다. 

따라서 솔루션을 제시하는 컨설팅적 측면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심리 상담이나 코칭 등의 현대적 상담 기법을 일부 도입할 필요도 있다. 애니어그램이나 테니지먼트같은 현대적 진단도구들은 그러한 상담을 전제로 만들어졌기에 자연스레 상담이 건설적으로 흐른다. 반면 명리학은 상담사의 자질과 가치관에 좌우되기 십상이다.

이것이 현대 명리학의 과제가 아닐까. 개인으로서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의 도구가 되어야 하며, 거기에서 얻은 혜안을 바탕으로 삶의 이정표마다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내공을 기르는 것. 둘은 같은 동전의 서로 다른 면이다.


24.05.30.(목)


(..)

밉지 않은 인정욕구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정말 사랑과 정성으로 집중해서 내어놓은 결과물을 주변에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남을 낮추고 자신을 높여서 누리려는 과시욕과 허영심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낳은 창조물을 설명하는 사람의 눈에서는 빛이 나고 꿀이 떨어진다.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의 언변이나 학식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미친 영향력 등의 '세속의 판단 기준'은 개입의 여지가 없다. 그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그가 대상에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 얼마나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그 조각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맸는지 등이다. 

그런 열정 가득한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함께 발맞춰 따라가보는 것에만 온통 주의가 집중된다. 그런 사람들의 존재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함께 있으면 나도 순수한 열정 그 자체를 받아 가는 것만 같다.




24.06.02.(일)


(..)

요즘 통 글씨 연습을 소홀히 했네. 매일 벽돌을 세웠을 때는 괜찮았는데 의식을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사라지는구나. 의식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까. 그 명제의 역도 성립할 것만 같다. 어쩌면 자연의 섭리는 이렇게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모호하여 서로 얽히고설켜있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직선적, 일방향적이 아니라 순환적, 쌍방향적에 더 가깝다.

(..)

길 위의 자신의 걸음에, 혹은 나아가고자 하는 커다란 방향성에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다시금 의도를 바르게 세워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길을 걸으려 했던 초심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자신의 의지와 의도를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다. 

의도가 명확해야 과정도 결과도 보다 분명해진다. 아웃풋에 대한 우려가 들거나 보완 또는 수정이 필요하다 여겨질 땐 인풋을 점검해야 한다. 드러나는 현상보다 내가 품은 의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결과에 대한 확신을(혹은 방향성에 대해) 운운한다는 것은 어떤 절대적 옳음 같은 것이, 어떤 정답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의도가 명확하다면 그에 따라 경험하게 되는 것, 내 삶에 나타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정답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외적인 기준에 의해 자신의 의도의 뿌리가 뒤흔들리게 내버려두지 않도록 하라.

대낮의 분주함과 밝은 빛은 외부의 온갖 메시지와 기준들이다. 밤에 어두워진 세상은 빛과 소음이 차단된 나만의 세계다. 어둠이 들어서야 비로소 나의 밤하늘에 박혀있던 달과 별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우린 그 고요가 주는 빛을 바라볼 힘을 기르고 그런 시간 속에서 진정한 나와 조우하는 시간을 가급적 자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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