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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10. 2024

활꾼들이 사는 세상

활터의 구조

언어는 곧 세계관이다.

언어는 그 개인의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기도 하고, 좁히기도 한다.


독서는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성비 좋은 세계 여행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면 그만큼 내가 인식하는 세상이 넓어진다. 활도 그렇다.


일상과 맞닿아있는 분야는 그 확장의 폭이 크지 않을 수 있지만, 활처럼 일상과 동떨어진 분야일수록 새로운 개념과 언어에 친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활터라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본 글에서는 활터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자 한다.






1. 이름


현대의 활터는 모두 '○○정(亭)'이라는 형식으로 통일이 되어있다. 서울의 황학정, 석호정 이런 식이다.

경기도 안성시에는 '안성맞춤'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하는 마춤정이라는 활터도 있다. 원래는 '정'만 있는 게 아니라 '터, 정, 당, 대'로 다양했던 것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소실되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며 남은 활터들이 서울의 황학정, 석호정, 인천의 무덕정, 수원의 연무정, 전주의 천양정 등 '정'의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에 생겨난 활터들은 남은 활터를 본보기 삼을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정'으로 통일된 것이다.


서울 종로구 소재 황학정의 전경 (ⓒ이로운넷)


또한 '정'이라는 이름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정(亭)이 정자나 누각을 뜻하기 때문에 과녁을 놓고 한 곳에 정자만 놓아두며 활 쏘다가 정자에서 쉴 수 있는 곳이면 '무슨무슨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많이 지어진 방식이라고 한다. 


다만, 요즘 시대의 활터들은 정자 수준이 아니라 밥도 해 먹고 잠도 잘 수 있는 규모로 지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옛날에는 이런 수준의 활터라면 '집 당(堂)' 자를 써서 '무슨무슨당'이라고 해야 맞다. 전통 사법의 바이블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궁술>에 따르면 '읍배당'이라는 이름의 활터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한다.


연무대(동정대) (ⓒ네이버 지식백과)


'대(臺)'라는 이름은 '당'보다도 더 규모가 크고 높이가 높은 경우를 일컫는다. 규모와 높이가 크다는 것은 그 건물이 함의하는 권위가 남달랐다는 뜻이 된다. 그만큼 공적인 행사나 중요한 역할을 겸하던 활터였다는 뜻이 된다. 수원의 '연무대'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 사대와 과녁



사대(설자리)는 활을 쏘는 곳이다. 사대는 한자어, 설자리는 우리말이다. 무겁은 과녁 뒤에 흙으로 둘러싼 곳이라는 뜻으로 한자같이 생겼지만 순우리말이다. 화살이 과녁 뒤로 멀리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흙으로 높이 쌓아놓은 것을 가리킨다.


과녁우리말이지만 한자말 관혁(貫革)에서 유래했다. 과녁이 관혁으로 불릴 시절에 과녁을 가리키던 우리말은 '솔'이었다고 한다. 맹금류 솔개에도 들어간 말로 '높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지보다 높이 올라와 있는 모양 때문에 솔이라고 부른 것이다.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무겁 그 자체를 과녁처럼 쓰다가, 그쪽에 천 같은 것을 댄 것을 이라고 한 것이다. 


솔포 과녁과 현재 협회 규격의 과녁
탐라순력도 묘사된 조선시대에 쓰인 과녁의 모습 (ⓒ국궁신문)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솔은 과녁을, 무겁은 화살이 떨어지는 자리를 나타내는 말로 분화되었다. 시합과 같은 공식 행사 때 천에다 동물 등과 같은 그림을 (사냥 연습이 주목적이니) 그려 넣으면서 솔포가 되었고 발음의 편의상 ㄹ이 탈락되면서 소포라고도 불리게 됐다.


솔포는 천이기 때문에 많이 맞히면 해지기 쉽다. 간혹 과녁을 지지하는 기둥을 맞히기도.


'정곡을 찔렀다'에 등장하는 정곡도 과녁에서 유래한 말이다. 솔포(또는 소포)는 천으로 만든 것이다 보니 자주 쓰다 보면 닳고 해지기가 쉽다. 그래서 가운데에 헝겊이나 가죽을 덧대어 썼다고 한다. 헝겊을 쓰면 정(正)이고, 가죽을 쓰면 곡(鵠)이라 하여 정곡이 됐다. 



3. 활과 화살과 관련된 시설이나 장비


활방(궁방弓房)은 활을 얹는(쏠 수 있는 상태로 세팅하는 것) 곳이다.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궁사들은 카본으로 편리하게 얹을 수 있는 개량궁을 쓰니 별도의 궁방이 필요가 없다. 활터에 따라서는 개량궁이더라도 활과 화살을 놓고 다닐 수 있는 개별 사물함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디 활방은 각궁(소의 뿔 등으로 만든 전통 방식의 활)을 얹기 위한 곳이다.


점화통(점화장)은 각궁을 넣어서 보관하는 통이다.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개량궁과는 다르게 각궁은 천연 소재로 만들어져 있어서 기온, 습기 등에 민감하다. 하여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나무 합판으로 가구 같이 통을 만들고 내부에 열을 발생시키는 전구를 넣어두는 식이다. 온도와 습도 유지가 되는 가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려나.


전기 화로 (ⓒYoutube, 클래스가 다른 최명궁의 활쏘기)


화로(곤로)는 딱딱한 상태의 각궁에 불을 쬐어서 부드럽게 만들어 모양을 바로잡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한 도구다. 옛날에는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그 역할을 했지만 요즘은 전기화로를 쓴다. 곤로라고도 많이 부르는데 곤로는 일본말이라서 엄밀히 따지면 화로가 더 우리말에 가깝다고 한다.


도지개와 궁창 (ⓒYoutube, 클래스가 다른 최명궁의 활쏘기)


활창애(궁창)도지개는 각궁을 얹는 과정에 쓰이는 도구다. 활창애는 활을 올릴 때 틀어지면 바로 잡을 때 쓰이는 도구다. 도지개는 활을 얹을 때 활의 소뿔 부분을 휘게끔 도와줘서 시위를 연결하는 것을 보다 수월하게 해 준다.


서울 공항정의 활걸이대(좌)와 청주 시민활터(장수바위터)의 활걸이대(우)


화살꽂이활걸이는 활과 화살을 거치해 두는 곳이다. 활걸이의 경우 한 면만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양면을 사용하는 타입이 있는 것 같은데 후자가 더 더 많은 활을 놓을 수 있어 좋아 보인다. 살놓이는 무겁에서 주워 온 화살을 놓아두는 곳이다. 예전엔 목재로 만들었으나 요새는 스테인리스 같은 재질로 만드는 것 같다. 협회에서는 시치대라고 부른다.


주살대는 줄이 달린 화살이 달려있는 장치로, 과녁에 얽매이지 않고 자세연습을 하기 좋은 장치다. 대부분의 활터에 하나씩은 구비가 되어있지만, 요즘에 생기는 활터에는 없는 경우도 있나 보다. 필자의 활터에도 없다. 없어서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다.


주살대에서 연습하는 모습. 줄에 화살이 묶여 있어서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다.


지금도 협회가 주관하는 공식 대회 때는 과녁 쪽에 심판이 있지만 예전에는 과녁 쪽에서 화살의 명중 여부를 알려주는 사람들(고전)의 역할이 컸다. 더욱이 그때는 화살이 과녁에 박히는 날카로운 화살촉을 썼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심했을 테다. 살가림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기상이 좋지 않을 피난처가 있도록 설치한 것이다. 요즘 활터에는 협회의 규정에 따라 고전 안전막이라는 형태로 배치가 된다.


살가림과 고전안전막 (경기도 이천 설봉정)


살날이(운시대)는 무겁에서 화살을 주워올 때(연전) 손으로 들지 않고 한 번에 나르기 쉽도록 하는 장치다. 도르래 형태로 되어있어서 예전에는 손으로 돌렸을 테지만 요즘에는 전기의 힘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운반이 되어 편리하다. 하지만 그 크기가 매우 크지 않기 때문에 전국 대회 같은 큰 규모에서는 사람이 커다란 통에 운반하는 경우가 더 많다. 평상시에는 쓰지 않고 대회 때만 쓰는 곳도 있고, 자유로이 쓰는 곳도 있다. 활터의 분위기마다 사용하는 풍습이 상이하다. 


살날이 대신 자전거에 통을 달아서 화살 운반용으로 쓰는 곳도 있다 (청주시 시민 활터).






참고자료


1. <한국의 활쏘기>, 정진명, 학민사 (2018)

2. 대한궁도협회. "경기장 대회시설점검표<http://kungdo.or.kr/bbs/board.php?bo_table=pds&page=1>

3. 사진자료는 출처 별도 표기. 출처 표기가 없으면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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