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Oct 17. 2024

활터를 운영하는 사람들

활터는 단순 취미 동호회가 아니다


지난 글에서는 활터의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활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양궁 체험장 같은 곳을 가본 적이 있다면 국궁도 '체험장', '놀이터' 같은 곳으로 가벼이 여길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해의 대전제가 필요하다. 처음부터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라면(감사합니다), 활터라는 곳의 대략적인 성격을 간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양궁 체험장의 총책임자가 '사장님'이라면 활터의 총책임자는 '사두님'이다.

사장과 사두는 다르다. 사장은 본인이 사업자만 낸다면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사두는 한 단체의 총책임자로서 선출직이다. 양궁체험터가 '사업장'이라면 활터는 지자체 및 대한체육회에서 운영 관리를 하는 국가의 자산이며, 운영을 위임받은 사두 이하 책임자 및 회원들의 모임은 취미 동호회가 아니라 사단법인과 같은 엄연한 법적 단체다.


활터를 사격장이나, 취미 체험장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은 활터의 관리자들을 '체험장 관리인' 정도로만 볼 수도 있다. 필자의 리듬에 맞춰 활터의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는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다 보면 활터가 갖는 의미와 그에 맞는 사람들에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무릇 사람이 모이고 규모가 갖추어지면 역할 배분이 필요한 법이다. 활터도 예외는 아니라서 역할에 따른 직책이 별도로 존재한다. 직책에 따라 크게 나누면 벼슬을 하던 사람과 일반 백성인 한량(무과준비생)으로 나뉘며 벼슬아치들이 주요 운영을 담당하면 한량들이 이를 보좌하는 방식이었다. 직무에 따라서 더 세세히 나누면 활터의 대표자이자 총책임자, 사풍(활터의 예절과 풍속 등)과 사법(궁술)의 교육 담당자, 활터의 운영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는 서울의 활터 기준으로 보면 사두, 선생, 행수 이렇게 직책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식으로 치환하면 각각 사두, 교장(또는 사범), 총무가 될 수 있지만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활터 행수는 활터 내부의 사무도 맡아서 보지만 동시에 사원들의 인격도 지도하고 활터의 풍속에 대한 교육도 집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활터의 총무는 활터의 사무 업무만을 담당할 뿐이다. 


시대가 변하는 것에서 비롯된 변화이니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겨야 할지, 온고지신의 자세로 옛것에서 배울 것은 배우려는 자세를 취해야 할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국궁인들 앞에 놓인 숙제다.



총책임자: 사두 (부사두)


'사두'는 활터의 대표자, 총책임자이다. 사두라는 직책의 존재 자체가 활터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어깨에 취미 동호회 이상의 무게감과 책임감을 갖게 하는 방증이 된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사두의 어깨가 무거운 만큼 활을 쏘는 개개인이 지녀야 할 마음 가짐 또한 단순한 스포츠, 게임, 놀이 그 정도로 활쏘기를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예전에 사두는 활터의 큰 어르신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활터들은 모두 '역대 사두'의 사진을 따로 모셔둔다.


종로 황학정의 역대 사두 사진. 참고로 1대 사두는 고종 임금이다. (ⓒ황학정 홈페이지)


'머리 두(頭)' 자를 쓰는 이유는 우두머리라는 뜻도 있겠으나 사대에 섰을 때 가장 먼저 쏘기 때문에 활을 쏘는 하나의 띠(작대)의 머리 역할을 한다는 뜻도 겸한다. 그러므로 총대표자에 대한 예우로서든, 작대의 맨 앞자리로서의 의미든 사두의 자리 (사대 1번 자리)는 사두가 없으면 늘 비워두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요즘 시대의 사두는 투표로 선출되며, 2년의 임기 기간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도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절차이나, 과거에는 더했다. 서울 지역의 활터를 기준으로 당상(堂上, 조선 시대에 정삼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 중에서 활을 쏜 지 오래되고, 덕망까지 갖춘 사람이어야만 사두의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선출은 투표 방식으로 이뤄졌고 맨 아랫사람부터 윗사람까지 올라가면서 단지에 점을 찍어 투를 했고 최고 득표를 한 사람이 사두가 되었다. 지금처럼 임기 기간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 종신제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부사두'는 말 그대로 활터의 부대표로 사두를 도와 활터 전반의 업무에 관여한다. 사두 유고시에는 부사두가 사두직을 대행한다.



교육 담당자: 선생, 교장, 사범


어릴 적 태권도를 다녔다. 그때에도 사범님과 관장님이 계셨는데 '사범'이라는 단어가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발음이 영 어색했다. 드래곤볼을 비롯한 여러 무협 만화 등을 본 통에 '사부'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그래서 '사부님, 사부님' 했던 기억이 난다.


'사부님' 하면 나는 오공과 크리링, 무천도사가 떠오른다. (ⓒ드래곤볼)


요즘의 활터에는 '사범'이 있다. 활을 어떻게 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직책인데, 예전 활터에는 사범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업무의 책임자는 옛날에는 '선생'으로 불렸다. 궁술만 가르친 게 아니라 활터의 풍속과 기율, 나아가 인격에 대한 것까지 두루 가르쳤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무과에 급제한 당하(堂下,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하(下) 이하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자리) 중에서 활을 오래 쐈고 명망이 높은 사람이어야만 했다. 사두와 똑같은 절차를 통해 뽑혔기 때문에 그에 준하는 권위가 있었다.


요즘에는 선생은 없고 '교장'으로 바뀌었다. 근대의 활터에서도 역시 교장은 사두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중요한 직책이다. 현대의 활터에서도 부사두와 거의 견줄 정도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부사두가 활터의 행정 전반의 책임자라면, 교장은 교육 전반의 책임자인 셈이다. 학교 교(校)를 쓰지 않고 가르칠 교(敎)를 쓴다. 예전에는 사법(궁술)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활터의 문화나 풍속, 규율 등에 대해 더 교육을 하며 스킬보다도 정신적인 교육을 담당했다.


김흥도 <활쏘기>


교육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두라고 해도 교육에 관한 한 교장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막 활터에 입문한 병아리 사원들은 교장이 직접 가르치기보다는 교장이 지정한 '접장(몰기를 하여 활을 어느 정도 쏠 줄 아는 사원)'이 교육을 맡았다. 그 사람이 요즘으로 치면 '사범'인 셈이다.


사범은 알고 보면 일본에서 쓰이던 사범이라는 표현이 국내에 유입된 말이다. 근대 스포츠가 도입되면서 같이 들어온 ‘코치(Coach)’의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옛날 활터에는 한량들(무과 준비생)이 활을 직접 세팅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해주는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활을 얹고 부리는 작업이 '잡일'에 해당했기 때문에 벼슬을 하는 사람이나, 벼슬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런 심부름을 도맡아줄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잘 만지던 것뿐 아니라 직접 만들 줄 알았다. 심지어 활도 제법 잘 쏠 줄 알았기에 궁술에 대해서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그들에겐 별다른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던 게 흠이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서 근대 스포츠 도입과 함께 '사범'이라는 말이 들어왔고, 그것이 흘러흘러 활터에도 들어오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은 사범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선생이나 행수 같은 직책이 사라지고 교장이나 총무 등으로 갈음이 되면서 사범의 역할과 지위가 높아져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운영 담당자: 행수와 총무(사무, 재무)


과거의 활터에는 '행수'라는 직책이 있었다. 행수는 활터의 행정 업무 전반을 맡았으며, 요즘식으로 하면 '총무'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대의 총무가 오로지 행정 업무만을 전담한다면, 행수는 그뿐 아니라 사원들의 인격 교육, 사풍 관리 등에도 일조하던 요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두와 선생을 뽑는 방식과 동일하게 선출되었다.


행수는 행중(行中, 함께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활터의 한량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활터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이가 있으면 행수가 견책했다. 요즘식으로 하면 활터 내의 징계위원회의 장인 셈이다.


'총무'는 해방 전부터 쓰인 말이라고 한다. 활터에 따라서는 좌의정 우의정처럼 좌총무 우총무가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업무가 달랐으니 나뉘었을 것이다. 한쪽은 사무 업무, 한쪽은 재무 업무를 맡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의 활터는 총무가 재무 업무를 겸하기도 하지만, 총무와 재무를 나누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무'라는 직책도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 요즘으로 치면 이사급에 해당하는 '장무', 삭회나 월례회 등 행사를 주관하는 담당을 한 '유사(有司)'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필자가 경험한 요즘의 활터에는 고문이나 감사, 이사 등으로 불리는 것 같다. 경기이사, 홍보이사, 연구이사 등 활터의 사정에 따라 다양하다.





활 쏘는 사람들: 사원, 사말, 접장, 한량, 활량



'사원'은 활터 내에서 활 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활터에 따라서 '사우'라고 조금 더 살갑게 부르기도 하고(필자의 활터는 그렇다), '회원'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는 활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사말'은 활 쏘는 이가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겸양의 표현이다. 홍길동이라면 자신을 지칭할 때 '사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말 홍길동은...' 이런 식으로 쓴다. 사극에서 보면 임금이 '과인이 부족한 탓이로다'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테다. 과인도 임금이 자신을 낮춰 부르는 표현으로 사말도 이와 비슷하다.


활 쏘는 임금은 사말인가 과인인가 (ⓒ 영화 <역린>)


하지만 이를 실제로 쓰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활에 진지하게 임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용어를 접하고 쓰는 편이다. 언어라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약속인지라, 나만 혼자 아는 단어를 쓰면 별난 놈 취급을 받기 때문에 지식으로만 알지 실생활에서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통 활쏘기의 명맥을 잘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계신 멋진 분들은 서면 상에서만큼은 왕왕 쓰는 말이기도 하다.


'접장'은 사전적인 풀이를 하면 한 '접(여럿을 하나로 묶어서 부를 때 쓰는 말)'의 장(長)이라는 뜻이다. 활 쏘는 사람들의 장이라는 뜻이니 거칠게 표현하면 무리 중에서 활좀 쏜다는 사람이 되겠다. 활터 내에서는 몰기(한 순 쏠 때 기준인 5발을 한 번에 모두 과녁에 맞히는 것)를 최소 1번은 해야 접장의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접장은 활 쏘는 이를 존중해 주려고 부르는 예의상의 명칭이기도 하다. 홍길동 씨가 사장이나 선생이 아니더라도 홍사장님, 홍선생님 하는 것처럼. 


이걸 모르는 현대의 궁사들은 누군가를 부르기는 해야 하는데 저 놈이 몰기는 안 했으니 접장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고(또는 불러주긴 싫고), 사우님 회원님은 입에 안 붙거나 어색하고 그래서 그냥 길동아~ 길동 씨~ 길동 형님~ 하고 부른다.


옛 민화 속 한량으로 추정(?)되는 인물 (ⓒ김흥도 <타작도>)


'한량(閑良)'은 요즘 사람들은 '백수'와 동의어로 알고 있지만, 사실 과거제도가 있었던 시절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문과 준비생들이 맨날 책상머리에 앉아있을 때 무과 준비생들은 활을 잘 쏴야 했을 테니 밥 먹고 사냥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가하게 놀러나 다닌다는 뜻으로 한량이라고 불려진 것이니 요즘의 백수와 통하는 바가 있긴 하다. 그러나 무과의 핵심이 활이었기 때문에 한량은 결국 활 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굳기 시작했고 급기야 '활량'이라는 말로 국어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러니 활 쏘는 이라면 스스로를 한량 또는 활량이라고 칭함에 있어 프라이드를 느껴도 되는 것이다.



그 밖의 사람들: 연전, 고전(장족한량), 거기한량


'연전(揀箭)'은 무겁에 떨어진 화살을 줍는 것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연전을 요즘처럼 다 같이 하러 가지 않았고, 직급이 낮은 사람들의 소임이었다. 그들마저도 아이들에게 푼돈을 쥐어주며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을 '연전동(揀箭童)'이라고 불렀다. 요즘 활터는 살날이가 있기도 하고, 각자가 자기 화살을 운동삼아 주워오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연전동이나 연전꾼은 사라졌다. 


'고전(告傳)'은 과녁에 화살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를 보고 알려주던 사람들이다. 요즘 활터에서야 과녁을 맞히면 점멸되는 신호등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고전이 없지만, 옛날에는 활터에서 보수를 받으며 고용되던 사람들이었다. 명중 여부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화살이 맞지 않았을 경우 과녁을 기준으로 어느 쪽으로 갔는지도 깃발을 흔들며 알려줬으니 대단한 중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은 원래는 장족한량으로 불렸다고 한다. 과녁에 화살이 박히던 옛 시절에는 화살이 박힌 곳으로 가서 망치로 두드려 명중 여부를 알려줬다고 하는데, 화살이 과녁에 안 박히게 된 이후부터는 망치 대신 부채나 깃발을 들고 맞은 곳을 알려주게 되어 장족한량 대신 고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지금도 협회 주관 전국대회나 승단심사 같은 곳에서는 고전이 있다. 다만 '원조' 고전과는 달리 고전 안전막 안에서 깃발만 내미는 내향형 고전이 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도 보면 귀엽긴 하다(?)



고전의 모습. (서울 무형문화재인 <서울장안편사놀이> (좌) / 전국승단대회(우))



'거기한량(擧旗閑良)'은 편사 때에만 역할이 있었던 사람이다. 편사는 편을 나누어 활쏘기 대결을 하는 일종의 놀이문화인데, 지금도 인천편사나 장안편사의 형태로 옛 흔적이 남아있다. 거기한량은 자기편을 상징하는 색의 기다란 깃발을 들고 있다가 자기편이 과녁을 맞힐 때마다 고전(장족한량)과 함께 과녁으로 달려가서 깃발로 크게 원을 그리며 관중 여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흥을 돋운다. 


고전(장족한량)과 거기한량(제11회 종로 전국활쏘기 대회 (좌) / 제1회 청주한량놀음 활쏘기 한마당(우))






활터는 하나의 유기체


사두에 머리 두(頭)를 쓴 이유가 또 하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있다면 나머지 손과 발이 있을 것이고 전체가 모이면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활터의 다양한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위치가 있는 것이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활터라는 하나의 조직이 온전히 운영이 되는 것을 나타낸다.


엄연히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있고 문화가 있기 때문에 국가지정 무형문화재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간소화가 되었다고 해도 활터 내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임원진들이 이렇다 할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활터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자신들이 다니는 활터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활터의 머리, 손과 발이 되어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늘 가슴속에 유념하며 '한량'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도록 하자.


사두는 사장님이 아니고, 

활터는 돈 내고 체험하러 오는 놀이터가 아니다.






참고자료


1. <한국의 활쏘기>, 정진명, 학민사 (2018)

2. 국궁신문, "활터 풍속이 변하고 있다.". 2022.04.14.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2167>

3. 충청매일. "[활쏘기문화산책] 활터 용어의 특수성". 2021.05.21. <https://www.ccd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1429>             

이전 05화 활꾼들이 사는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