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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31. 2024

활터는 익명 게시판이 아닙니다

예절을 깎아먹는 활꾼의 방어기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무릇 성인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고 변호하기에만 급급하다면, 그건 책임감 있는 성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여느 때처럼 외부에서 온 접장님들과 우리 활터의 접장님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활을 내고 있던 날이었다. 외부에서 오신 어느 접장님이 쏘신 화살이 과녁이 아닌 그 옆 과녁의 사대로 날아간 것이다. 과녁이 아니라 옆 사대로 화살이 날아와서는, 우리 활터의 접장님 다리에 스치듯 맞는 사고가 발생했다. 


모르긴 몰라도 활을 아직 잘 다루지 않은 상태에서 활을 쐈던 것으로 추측한다. 천만다행으로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상의 정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녁이 아닌 사람 쪽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는 것이 문제다. 큰 인명 피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미지 출처: 국궁신문



책임지는 사람이 성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당시 현장에 계시던 사두님이 그 활을 쏜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온 일행들 중 책임자를 찾았다. 사두님은 그들의 소속을 물었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의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하니 지극히 당연한 처사다. 그런데 일행을 대동하고 온 책임자는 왜 소속을 밝혀야 하느냐며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응이다.


활터는 온라인 익명 게시판이 아니다.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밝히는 것은 곧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첫걸음이 된다. 허리춤에 맨 궁대에는 자신의 소속과 이름이 적혀있다. (따라서 숨기려고 해도 본 사람은 다 알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종의 신분증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버젓이 마음만 먹으면, 궁대를 뺏어서라도(?) 알아낼 수 있는 신상을 숨기는 저의는 무엇일까. 소속을 묻는 것이 대체 왜 기분이 나쁜 일,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 일이 되는 건지 나의 좁은 속내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책임자 본인도 당황스러웠을 테고, 자신이 벌이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공개적인 곳에서 추궁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충수였다. 그 해프닝 이후로 우리 활터는 더 이상 익명으로 이용이 어려워졌다. 활터 이용을 하려면 소속과 신분 및 활을 배운 지 얼마가 되었는지까지 소상히 밝힌 뒤 회원 가입을 해야만 하고, 이용 시마다 발급된 출입 카드를 제시하여 자동으로 출입자의 신원을 알 수 있게 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 익명의 그늘에 숨어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던 활꾼들과는 안녕이다.







필자가 속한 활터는 외부 출입객들의 방문이 비교적 잦다. 시설도 깔끔한 편이고, 꼭 회원 가입을 하지 않더라도 1일 이용료만 지불하는 게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장점이 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기에 가능할 때가 많다.


따라서 장점을 누리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받는 혜택이 당연하다는 특권 의식은 내려놓아야 하며, 불편함을 감수하는 입장에서는 너른 가슴으로 타인의 편리함을 위해서 자신이 편리를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서로 조화가 가능하리라. 조화가 깨지면 장점과 단점을 누리던 자들의 입장은 바뀌기 마련이다. 장점을 누리던 자가 이제 불편해지고, 단점을 감수하던 자들이 편해지게 된다. 자업자득이다.


서로 먼저 인사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조심하고

그럼에도 발생하는 사건과 사고에 대해서는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활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도구계훈'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누가 최초로 저 말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인지는 아직까지 명확한 출처가 없고, 개인적으로는 '궁도'라는 표현을 우리 활에 가져다 쓰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좋은 내용들이 많다.


으레 있는 형식적인 좋은 말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활을 쏘러 올 때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해야 할 행동강령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궁도구계훈
1. 정심정기(正心正己): 몸을 바르게 함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고
2. 인애덕행(仁愛德行): 어짊과 사랑으로 덕스러운 행실을 하고
3. 성실겸손(誠實謙遜): 정성스럽고 참되며 남에게 나를 낮추어 순하게 대하고
4. 자중절조(自重節操): 자신의 품위를 소중하게 하고 절개와 지조를 굳게 지키고
5. 예의엄수(禮儀嚴守): 예를 차리는 절차와 몸가짐을 엄하게 지키며
6. 염직과감(廉直果敢): 곧고 청렴하며 용감하고 결단성을 강하게 가지며
7. 습사무언(習射無言): 활 쏠 때는 말하지 말 것이며
8. 불원승자(不怨勝者):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 것이고
9. 막만타궁(莫彎他弓): 남의 활을 당기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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